◆서민호 텔레칩스 사장
지난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중국 대륙을 강타했을 무렵, 서민호 텔레칩스 사장(42)은 베이징 공항에 내렸다. 항상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베이징 공항은 한산했다. 전염병의 여파로 중국의 출입국이 금기시됐지만 서 사장은 신경쓰지 않았다. 칩 설계에 반드시 필요한 USB 반도체 설계 자산(IP)을 중국 업체와 함께 설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는 방제 차량들이 약을 뿌리며 돌아다니고, 거리는 황량했습求? 그러나 저는 한 달에 두 번은 그곳을 가야만 했습니다. 시장의 필요에 따라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전염병이고 뭐고 염두에 둘 틈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갔습니다. 사스에도 무작정 중국을 찾았더니 중국 파트너사들도 더욱 신뢰하고 민첩하게 움직여 주더군요.”
서민호 사장은 이처럼 물불 안 가리고 몸을 던져 일하는 스타일이다. 목적을 정하면 위험을 아랑곳 안고 달려들어 정면 승부를 걸어야 지름길이 보인다는 것이 서사장의 신념이다.
벤처로 뛰어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전자 연구원 시절 밤샘해 칩을 개발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엔지니어가 대접받지 못하는 시절이라, 그는 항상 마음 한구석에 불편했다. 연구원이 연구만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30대 중반까지 관리자가 안되면 도태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대기업 근무 당시에 팩스 컨트롤 칩 등을 설계해서 전기·전자 기술자 협회(IEEE)에 논문을 제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국내에서는 순수하게 엔지니어로 일하기 힘든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과장 승급 시험을 보러가면서 친구 한 사람이 창업되는 회사에 가자는 제안을 했고 저는 그 자리에서 그러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내 시스템반도체 1세대 업체인 씨앤에스테크놀로지의 핵심 엔지니어로 활동하면서 벤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지난 99년 말 이장규 부사장과 독립을 해, 현재의 텔레칩스를 차렸다.
“처음 개발한 칩은 발신자번호표시(CID) 칩이었습니다. 당시에 국내 텔리안이라는 회사가 GE브랜드로 전화기를 제조해 수출하고 있었는데, 개발비 1억원을 지원받아 칩을 제작해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CID 칩은 국내뿐 아니라 홍콩의 CCT라는 회사로 수출되면서 이 분야에서 유럽의 몇몇 회사 등과 함께 주요 업체로 부상하게 됐다. 이뿐 아니라 이 칩을 통해서 현재도 연간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현재 주력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칩을 제작할 수 있게 한 자금줄이 됐다.
하지만, CID로 인해 한때 텔레칩스 간판을 내릴 뻔했다. 서 사장은 지난 2001년 5월 발신자표시서비스가 시행되면서 칩이 많이 팔릴 것으로 예상해, 미리 칩을 제작해놨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국내 유선통신사업자들이 초고속인터넷에 투자할 뿐 기존의 전화망을 전전자식 교환기로 대치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서, CID 서비스는 마냥 지체된 것이다. 결국, 장비업체들이 연쇄 부도를 맞으면서 여파는 ‘쓰나미’가 되어 칩 업체로 왔다.
“칩 재고만 20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문을 닫을 뻔했습니다. 그나마 우리 회사의 기술력을 인정한 일부 투자자들이 자금을 융통해주면서 간신히 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CID 칩은 이제 다시 효자가 되었습니다. KT에서 ‘안’폰을 하면서 저희 칩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업은 뜻한 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고 있습니다.”
서사장은 CID와 함께 다른 사업으로 MP3P용 프로세서를 창업 다음해부터 개발해왔다. 당시에는 MP3 칩에서는 디코딩 기능만이 주였으나, 여기게 인코딩(녹음 기능)을 추가한 칩을 개발해 세계적인 오디오 업체들을 공략했다. 한 3년간의 노력이 지난 2003년경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MP3 열풍이 돌기 시작하면서 세계적으로 휴대용 및 차량용 CDMP3플레이어를 비롯한 플래시메모리 MP3P가 유행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보고 접근했습니다. 특히 오디오 기기에 플래시메모리 장치를 직접 꼽아서 쓰는 형태의 시장이 올 것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칩을 개발하고 고객을 설득했습니다.”
그냥 칩을 개발해서는 대만 등 이미 제품을 가진 업체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USB호스트 플레이어에 힘을 쏟는 것이다. 사스 창궐에도 베이징을 한 달에 두어 번씩 찾아야 했던 것도 바로 이 칩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유명 오디오 업체들이 홍콩, 선전에 몰려있습니다.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 선전에 연구개발센터도 세웠습니다. 지난해부터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렸습니다. 톰슨이라는 세계적인 업체가 채택해 매달 한 모델씩 오디오가 나오고 있고 이제는 일본 업체들도 장기간의 검토를 마치고 생산 직전입니다.”
이제 텔레칩스의 멀티미디어 칩은 MP3P, 오디오 기기를 넘어 휴대폰에도 들어간다. 이미 LG전자의 ‘리얼 MP3 폰’이 출시됐고, 삼성전자 등에서도 나올 예정이다.
텔레칩스는 앞으로 MP3P 저작권 이슈 및 유통 구조 변화로 인해 MS의 재너스(JANUS) DRM 탑재 제품이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고 이미 인증을 받았다. 또 유럽의 디지털오디오방송(DAB) 및 국내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시장을 겨냥해 방송 베이스밴드 칩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중이다.
“저희는 앞으로도 세계 시장을 겨냥할 것입니다. 팹리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시장만으로는 좁습니다. 모든 칩 제작을 세계 기준으로 하고 있고, 이제 일부가 인정받기 시작한 듯 합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텔레칩스는 어떤 회사>
텔레칩스(대표 서민호 http://www.telechips.com)는 지난 99년 설립된 팹리스 반도체 업체로 멀티미디어 칩인 디지털미디어 프로세서, 발신자정보 표시 칩,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칩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 회사는 자본금 40억2000만 원으로 지난해 12월 코스닥시장에 등록, 중견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 회사가 발을 들여놓은 부분은 최근 들어 급부상하는 멀티미디어 휴대기기 분야다. 텔레칩스는 MP3플레이어(MP3P)에서 음악파일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칩을 설계·제작, 세계 시장에서 수위다툼을 벌이고 있다.
텔레칩스는 지난해 세계 플래시메모리 MP3P용 칩 부분에서 18%의 점유율을 확보, 미국 시그마텔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분야에서 강자이자 거대 기업인 필립스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텔레칩스는 앞으로 휴대폰 시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칩을 개발, 사업 영역을 넓힌다는 전략이다.
멀티미디어 칩 외에 CID 칩은 이 회사의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꼽힌다. 비록 성장성은 없다고 하지만 텔레칩스가 이미 이 시장을 선점한 데다 앞으로 큰 경쟁 없이도 연간 100억원대의 매출이 기대되는 분야다. 텔레칩스는 GE, 모토롤라, 파나소닉 등 주요 전화기 업체에 칩을 공급하는 등 미국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했고 국내 시장에서도 대략 70%를 확보했다.
멀티미디어 칩과 발신자번호표시 칩 등으로 텔레칩스는 지난 2003년 169억 원, 2004년 461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창업이래 두 배 이상 성장해왔다. 올해는 MP3P, 발신자번호표시 등의 시장에 국한하지 않고 휴대폰, 하드디스크형 제품 등으로 시장을 넓히는 등 고성장세를 지속한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