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시대의 전자산업=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창성기는 6·25동란 이후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전자산업의 태동을 예고하는 움직임은 있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말인 1885년 서울∼인천 사이에 가설된 유선전화가 한국 전자 및 통신산업의 효시로 평가된다. 이후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1910년대에는 무선전화의 송수신 시험이 실시돼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전파의 공중발사로 기록되고 있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체신국에서 방송사업연구에 착수해 1925년에는 마주 4회의 정식 시험방송이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마침내 192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개국돼 이듬해부터 라디오방송이 시작됐다. 이렇듯 식민시대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통신과 방송 등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발효로 실질적인 주권이 일본에 침탈되기까지 우리나라 전화사업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서울을 중심으로 개성·평양·수원 등 주요 도시로 공중전화 설치가 확대되고 도시마다 고유한 교환업무가 생겨난 것도 이 시기다.
을사늑약에 앞서 1905년 4월 한일통신협정이 체결됐다.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주권침탈에 앞서 통신권을 먼저 빼앗은 일제는 우리나라의 통신시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일통신협정 당시의 전화설비는 에릭슨의 자석식 단식교환기와 벽걸이 전화기, 일본인 거류민단에 시설돼 있던 일본제 자석식 단신교환기와 델빌(Delville) 전화기 등이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전화가입자로 인해 단식교환기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08년 경성에 공전식 복식교환기가 설치됐고, 1911년엔 부산에도 감시신호식 복식교환기가 설치됐다. 시외교환기도 소형 시외교환기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1911년 경성국의 공전식 시외교환기를 제외하고는 1913년 이후 부산국 등에 직렬식 복식교환기 및 공전식 복식교환기와 대형 시외교환기로 개체했다.
1930년엔 전화가입자수가 1920년보다 2배 이상 증가해 대도시에는 성능이 우수하고 대용량인 자동식 교환기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1933년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식 교환기 설치공사가 착공돼 2년 후인 1935년 9월 준공되면서 스트로저(Strowger)식 자동교환기가 설치됐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자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나라에 확대해 나갔다. 많은 일본의 상사와 회사가 한반도에 진출함에 따라 종래의 통신시설로는 늘어난 통신량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 통신시설이 크게 파괴돼 조선총독부는 유선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1922년 3월에 체결된 산동철병조약으로 일본의 시베리아 주둔군과의 직접통신이 필요없게 되자 경성육군무선전신소를 1923년 4월 1일 육군측으로 인계받아 경성우편국 용산전신분실로 개편하고, 일반 공중무선 전신업무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취급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정통신을 시작한 것은 1926년부터로, 동경무선국과 처음으로 전보를 취급했고 1927년에는 오사카 무선국과 정식으로 무선 전신을 개시했다. 이후 경성무선국 외에도 목포, 제주, 청진, 부산, 울릉도, 진남포, 강릉, 원산, 인천, 나진 등에 무선전신국이 설치돼 지역 특성에 맞는 통신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1938년 완성된 만주와 일본간의 무장하(無裝荷) 케이블의 포설은 우리나라 전기통신사업이 중계지적인 입장에서 경영되지 않았다면 생각할 수 없었던 대규모 시설이었다.
그러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든 사회 및 경제제도가 전시체제로 개편되면서 전기통신사업도 방위통신체제로 개편됐다. 이로 인해 한글 전보의 사용정지, 가입전화의 공출, 전보특수취급의 제한 등 여러 가지 조치가 시행됐고, 우리나라 전기통신사업은 전면 중단되는 시련을 맞았다.
일제시대인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되고 라디오방송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통신사업 및 전기기기공업이 영세한 규모로 시작됐다. 그후 일제통치하의 한반도에는 차례로 14개의 방송시설이 개설돼, 꽤 많은 사람이 라디오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일제는 한반도의 공업화를 기피했으므로 한반도에는 사실상 라디오 조립공장 및 라디오 부품공장이 없었다. 광운상회(光雲商會) 등 몇 안되는 라디오상이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라디오수신기를 조립·판매하기 시작했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시대를 연 최초의 전자제품이 1959년 11월 금성사가 개발한 진공관 라디오수신기(A-501)라는 점을 볼 때 순수 우리나라 기술이 적용된 전자산업은 해방 훨씬 이후가 돼서야 빛을 보게 된다.
△식민시대의 전자산업 진정한 발전인가=일제 식민기의 전자 및 통신산업을 두고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득이 되었는지, 아니면 실이 되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식민시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측은 수탈여부의 목적을 떠나 우리나라 철도, 도로, 통신망 등 기반 인프라 확충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당시 각종 개선된 경제지표를 근거로 득이 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자 및 통신산업과 관련된 종사자나 산업사 기술적 관점에서 이를 진정한 득이라고 평가하는 입장은 사실상 없다. 수탈을 목적으로 한 산업발전은 수혜자가 극히 일부로 제한돼 있어 진정한 발전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개화기를 맞고 있던 대한민국이 식민통치 하에 비해 산업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을지 퇴보했을지는 추산하는 것 차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일제가 개선한 전기통신 사업은 식민통치를 본격화하면서 우리민족을 강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본은 경비통신망의 확장 및 강화를 위한 군경통신시설과 대일, 대만 통신망의 개량 강화에 치중한 나머지 공중통신에 기여한 바는 극히 미약했다. 이런 사업방식이 극도로 통신시설의 부족을 초래하자 일제는 1922년 600만원의 공채를 발행, 전신전화확장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의 재정긴축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추진은 1930년에야 제2차 확장계획을, 1937년에 제3차 확장계획을 수립해 실시하는 등 힘을 받지 못했다. 이 계획조차도 만주사변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다.
라디오 방송은 문맹자에게도 쉽게 전달될 수 있어 민중계몽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일제의 엄격한 통제에 의해 목적 달성은 불가능했다. 당시 방송은 한일 양국어를 혼합해 방송한 데다 한국어 방송은 시간의 제약과 극히 제한적인 프로그램 내용 등으로 방송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수신기의 설치도 체신국 감리과에서 사설 무선전화시설원을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라디오수신기의 보급은 경제적인 사정과 더불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 개국 일주일 후인 1927년 2월 22일 라디오 등록수는 1440대로 이중 한국인 소유는 275대에 불과했다. 연말께 그 수가 4배로 늘긴 했지만 당시 인구 2000만명을 고려하면 미미한 편이다. 그 시대 오히려 허가를 받지 않고 라디오를 청취한 사람이 등록자의 4배에 이른다는 통계만 보더라도 일제는 혜택확대가 아닌 엄격한 통제로 일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한장으로 보는 전자산업-국내 최초, 세계 3번째 절전형TV ‘이코노TV’
삼성전자는 1975년 4월 30일 국내 최초로 절전형TV 개발에 성공, 그해 6월초에 시제품을 생산했다. 절전형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은 당시 TV 브라운관의 작동구조에서 비롯됐다.
당시 일반 TV는 시청하지 않는 시간에도 브라운관을 계속 가열하는 예열과정을 거쳐야만 순간수상(瞬間受像)이 가능했다. 하지만 삼성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에선 3번째로 순간수상방식 브라운관을 개발하고, 이를 채용한 TV를 절전형TV로 명명했다.
이 TV는 스위치를 끄면 TV 자체가 전원과 완전히 차단되고, 스위치를 넣으면 바로 화면이 나타나게 돼 예열과정이 필요 없었다. 이에 따라 TV 수명은 약 2.25배 연장되고 하루 5시간 시청 기준으로 약 20%의 전기료를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시가 제1차 석유파동 이후라는 감안하면 가계나 국민경제면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기술혁신이었던 셈이다.
삼성전자는 이 신제품의 브랜드를 절약과 경제성을 상징하는 ‘이코노TV’로 정하고 같은 해 8월부터 TV 생산라인 1개를 증설, 연간 72만대의 생산능력으로 14인치 흑백 TV 양산에 들어갔다.
절전에 대해 매우 예민한 시기여서 신제품의 성능과 이코노라는 상품명의 인기가 대단했고 시장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1975년 11월부터 TV수상기의 내수판매는 처음으로 월 3만대를 돌파했고, 12월에는 3만4000대가 팔려나가 월간 시장점유율 수의를 차지했다. 이에 힘입어 삼성의 1975년 전체 TV 내수판매는 전년의 9만2151대보다 크게 늘어난 17만9596대를 기록했다.
이코노TV 생산과 함께 1975년부터는 수출에도 힘을 쏟기 시작했고 노력의 결과로 같은 해 삼성의 흑백TV는 캐나다 정부로부터 일반특혜관세(GSP)의 혜택을 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AGS, JUTAN 등 유력 바이어들을 개척해 이듬해에는 캐나다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히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세계의 경기상승으로 선진국의 주문이 쇄도하면서 1976년 수출은 26만1600여대로 내수판매량을 따라 붙었다. 이해 삼성의 수출실적은 1900만달러를 기록하며 연간 400%의 신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이코노TV’의 수출호조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삼성은 1978년 연간 판매량은 74만6000대, 시장점유율 40.9%로 국내 정상에 올라서면서 ‘이코노’ 효과를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