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과광…”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휴전선에서 울리기 시작한 포성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암흑기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6.25전쟁이 우리 민족의 비극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제점령기에서 해방된 이후 서서히 태동 움직임을 보였던 전자산업은 이때부터 철저히 파괴되면서 또다른 비극을 몰고 왔다. 해방 이후 일제가 남기고 간 근대적 산업시설을 비롯해 사회·경제 전반의 시설물이 거의 불타 버렸고 우리 정부의 계획이나 노력은 완전히 물거품이 돼버렸다. 3년간의 전쟁으로 22억달러에 달하는 전쟁피해가 발생했고 생산활동도 극도로 위축됐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한국전쟁은 많은 건물을 비롯해 도로·다리·공장·발전시설 등 남김없이 파괴했다.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손실은 사람이었다. 남한 전쟁 사망자는 15만명에 달했고 행방 불명자는 20만명, 부상자는 25만명이었다. 이재민은 수백만명에 육박했다. 전후 재건사업에 인적자원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4100억환(약 22억8000달러)으로 공업시설은 43%가 파괴되고 발전시설은 41%가 무너졌다. 당시 절대적인 에너지원 역할을 담당했던 탄광시설도 절반이 사라졌다. 주택은 3분의 1가량이 파괴됐다. 표 참조
1950년대 경제 인프라의 핵심은 전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던 해에 우리나라 전력설비는 남북을 모두 합쳐 172만2000㎾. 전력 생산은 거의 수력에 의존했으며 전체 발전시설의 88.5%가 북한지역에 치우쳐 있었다. 지난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정치적 이유로 남쪽에 대한 송전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남한은 큰 혼란과 괴로움을 겪었다. 어렵게 가동해온던 생산시설들이 문을 닫고 일반 가정도 3분제나 격일제로 송전하는 등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렸다. 이때부터 정부가 자급 노력을 기울여 자체 수급을 위한 시설 마련에 나섰으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려 남한내 전력수급량이 20%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쟁기간 중에는 전력난을 해결할 방법이 없자 동해와 황해상에 정박해 있는 미군 화이트호스(White Horse)호와 임피던스(Impedence)호 등 발전함에 의존하기도 했다.
피폐한 전기공업시설의 복구는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기존 업체의 재건 형태로 이뤄졌으나 전력난은 지속돼 지난 1961년 한국전력이 발족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전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51년부터 조선전업·경성전기·남선전기 등 3개 전기회사를 통합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10년만인 1961년 7월 1일 한국전력이 설립된 것이다. 이때 남한 발전 용량은 37만7000㎾에 불과했다. 2005년 현재 남한의 총 발전용량은 당시에 비해 140배가량 늘어난 5200만㎾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미군과 가전=우리 국민들이 가전을 처음 접한 시기도 바로 전쟁 발발과 함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투입된 미군들이 가져온 세계적인 진공관 라디오인 ‘제니스’ 라디오가 바로 그것이다. 또, 배편으로 밀수된 일제 ‘산요’ 라디오도 이때 등장했다. 전쟁일 한창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나 정부에서 취한 대국민 방송은 정확하지 못했던 일이 빈번해 살림살이가 부유한 일부 가정에서 미국과 일본 방송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전파 수신기를 고가로 구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 중에 반공호에 피신한 피난민들이 미군들으로 부터 어렵게 얻은 제니스 라디오로 세상 밖 소식을 듣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도 이 라디오들은 일부 부유층 안방에서나 볼 수 있던 귀한 물건으로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만9000환이었던 시절에 쌀 50여 가마 값에 암거래가 성행됐었다. 워낙 고가이다 보니 한집에 제니스 라디오가 있으면 그것을 전화선처럼 집집마다 이어 달아 같이 듣기도 했다.
이때부터 우리 국민에게 미제와 일제는 최고급품이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힌 계기가 됐다.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58년 LG전자 전신인 금성사가 창업된 후 1년만인 1959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산 라디오를 생산될 때까지 미제와 일제 라디오가 미싱과 함께 재산가치 1호로 자리를 잡았다. 상대적으로 전후 우리 기업들은 전쟁으로 기술과 고급인력이 부족한 상황에 자재난까지 겹치면서 날림 전기제품을 양산, 국산 제품에 대한 불신 풍조가 팽패했다.
그러나 지난 1995년 금성사 후신인 LG전자가 우리 국민에게 보물로 여겨졌던 라디오를 생산한 미국 제니스를 전격 인수했다. 한국전쟁 발발 45년만에 일어난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전쟁과 기업=전쟁 이후 경제재건 과정에서 외국 원조에 의한 상업 자본이 팽창하면서 이때부터 대규모 기업들이 출현했다. 높은 인플레이션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도기업들이 부상하는 등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태동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전쟁기간 중 정부는 부족한 세금 보전을 위해 세수를 최대한 인상했으나 전체 세입 총액의 50% 이상이 부족, 미국 경제원조에 의존했다. 전쟁 중 직접적 군사원조 외에도 미국 원조총액은 약 10억달러에 이르렀다. 전시 인플레가 진행되면서 원조물자 도입과 배분은 일부 대형업체들의 광범위한 자본축적 기반을 제공했다. 한마디로 막대한 인플레이션 이득을 독식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권력과 기업 간 유착이 이뤄졌으며 이때부터 줄기차게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 ‘정경유착’의 효시인 것이다. 반면, 이 시기에 축적한 기업의 자본과 경험이 이후 60년대 본격적인 공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에 토대가 됐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전후 8년 동안 공업화 비중이 높아져 연평균 10.8% 성장률을 보였으며 전기통신 사업도 복구를 서둘러 1959년 초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즈음 국내 첫 전자업체인 금성사의 등장과 첫 국산 라디오 등장으로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본격적인 태동기에 접어든다.
◆사진 한장으로 보는 전자산업
-국내 최초의 전화기 ‘금성 1호(GS-1)’
LG전자(당시 금성사)는 1959년 국내 최초로 라디오(A-501) 개발에 성공한 후 자신감을 얻어 1960년 연말 이후 계속적인 증자를 통해 경영 기반을 마련했다.
드디어 1961년 2월 초 새로운 사업 분야인 전화기의 개발과 생산을 위해 생산1과 밑에 전화기실을 신설하고 기술부서를 13개로 확장, 신기술 및 신제품 개발에 전력 투구하려는 의욕을 과시했다. 1961년 4월에 1억원씩 2회 증자를 통해 새 사업의 자금을 확보한 당시 구인회 사장은 양한모 팀장이 이끄는 생산1과에 국산전화기의 조기 개발을 지시했다.
당시 국내 전화기 시장은 선진국 전화기를 수입하여 체신부에 납품하던 한국통신공업과 교환기 부품을 생산 공급하면서 1960년 4월 이후 국산전화기 개발을 추진하던 곳은 동양정밀뿐이었는데 구인회 사장은 경쟁 상대인 양사 기술진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국산 전화기를 한발 먼저 개발하여 국내 전화기 시장을 선도할 계획이었다.
1961년 2월 말 개발작업을 본격화한 양한모 팀장은 체신부 전무국(電務局)이 제시한 방식에 의존치 않고 독자적으로 목형을 만들고 디자인하여 트랜스 포머, 벨 스크류 등을 자작하고 일부 핵심 부품은 수입품에 의존 이미 고도화된 성형 기술을 통해 플라스틱을 원료로 손색이 없는 케이스를 제작했다.
최고 경영진의 각별한 관심과 지도의 보람으로 개발 작업은 의외로 급진전하여 작업개시 6개월만인 1961년 7월 18일 마침내 국산 자동전화기 ‘금성 1호(GS-1, 체신부 표준:체신 자동 1호)’는 아담한 모양으로 첫 선을 보였다.
이 제품은 다이얼 판의 경우 가격 면에서 타사 제품보다 50% 정도 고가이긴 하나 특수 플라스틱소재를 사용하여 파손되거나 변색 및 투명도 저하 등의 염려가 없고 벨의 재질과 두께도 국제 규격이다. 또한, 고저음의 조화 및 원거리 시외통화시의 음성의 명료도도 분명했다.
◆에피소드
‘체신 자동 1호’라는 체신부 표준 명칭을 가진 ‘금성 1호(GS-1)’은 체신부 중앙전기시험소의 특성 시험결과 합격 판정을 받고 시판을 시작했다. 특히 체신부 시험결과 독일의 지멘스사 제품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미국 500형 전화기 및 일본 ‘4호 전화기’에 버금가는 통화품질로 당시 언론 매체들이 대서특필로 소개해 LG전자(당시 금성사) 임직원들의 자긍심을 북돋웠다.
서동규기자@전자신문, dkseo@
사진: 국내 최초의 전화기 ‘금성 1호(G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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