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3주년 특집Ⅰ-상생경영]소비자와 기업

 기업이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들은 구매를 결정하는 전통적인 구조가 무너진 지 오래다. 소비자들이 제품 기획단계에 참여해 생산자로서 활동하는가 하면, 이제 갓 나온 제품을 평가하면서 기업의 마케팅 활동에 참가한다. 소비자들은 원하는 제품을 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기업은 더 잘 팔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득이 된다.

 기업과 소비자 간 경계 허물기가 모두에게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소비자는 가격에서 충돌한다. 물건에 대해 ‘제값’을 매기는 기준 차이에 따른 것이다. 옛날과 달리 가격비교사이트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싸게 파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소비자들에게 비싼 가격은 ‘거품’이며 ‘속임’일 뿐이다. 그러나 같은 제품을 더 비싼 값에 파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서비스’의 가격이라고 주장한다.

 ◇싼 것이 최고(?)=컴퓨터의 CPU나 주변기기의 경우, 정상적인 유통경로를 거쳐 수입된 제품과 밀수된 제품의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러한 제품들은 정상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품이다.

 벌크 제품이란 제조원이 PC제조업체에 OEM방식으로 공급하는 것으로 소매용과 달리 상품이 박스 포장이 안 돼 있다. 또 밀수 제품은 소매용으로 개별 박스로 포장돼 있으나 공식 대리점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는 제품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제조원이나 대리점에서 덤핑 처리된 물량이 다양한 경로를 거쳐 시장에 유입된다.

 사정이 이렇지만 해당 업체들은 가격인하를 통한 맞대응 이외에는 마땅한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공식 대리점들은 벌크와 밀수 제품의 유입을 막기 위해 AS를 차별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가를 무기로 한 이들 제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가격 인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품질과 서비스의 하향 평준화를 가져온다. 악화가 양화를 내모는 가장 단적인 사례다.

 하드웨어 업계의 이러한 상황도 소프트웨어 업계에 비하면 양호한 축에 속한다. 처음부터 공짜에 길들여져 온 소비자들이 정품 소프트웨어에 지갑을 열 리 만무하다. 더 싼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아예 공짜를 원한다. 더군다나 소프트웨어는 정품이나 불법복제 제품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 불법복제는 만든 사람의 노력을 공짜로 가로채는 절도와 같은 행위라고 역설해도 이미 공짜 제품을 이용해온 소비자들의 행동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 무료로 MP3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마케팅의 일환으로 일종의 시험용처럼 배포하는 베타버전을 사용하던 사람들에게 소프트웨어에 대한 비용을 내라는 것은 오히려 황당한 일이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불법복제를 할 수 없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하드웨어 인증방식까지 도입하는 등 불법복제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했다. 정부도 불법복제를 처벌하겠다고 나섰다. 미국에서는 새롭게 연방법이 발효돼 저작권 침해 등의 혐의로 십수년 징역을 살 수도 있게 됐다.

 ◇결국은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컴퓨터 주변기기를 수입·판매하는 한 업체는 “우리나라 기업이 만든 제품도 해외를 통해 유입된 제품 가격이 몇 만원씩 싸기도 하다”면서 “이런 제품들은 벌크제품으로 박스도 없고 AS도 받기 힘들지만, AS 받을 일이 많지 않은 제품이라면 소비자들이 벌크제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벌크제품으로 쏠린다면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무형의 서비스에 대해 지갑을 여는 것을 꺼린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정상유통 제품이 ‘가격’만큼 서비스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비싼 가격을 ‘폭리’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결국 소비자와 기업은 모두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피해를 보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최근 위조 메모리카드가 다량으로 유입돼 소비자들이 피해를 봤다. 디지털카메라의 불량으로 오인한 소비자들이 많아 해당업체에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다. 불법제품이 일으킨 문제는 보상받을 길이 없다.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드는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날 수 있는 길도 요원해진다.

 ◇기업과 소비자의 아름다운 동행이 필요하다=소비자의 잘못된 구매관행은 결국 소비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온다. 위조제품이 판을 치는 것은 그런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기업이 ‘공짜’만 밝히는 소비자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동안 대책 없이 공짜 소프트웨어를 뿌리거나 불법복제를 방치했던 것은 바로 기업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들은 자기 주머니 챙기기에 바빴을 뿐, 제 값을 주고 제품을 사는 소비자들에게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올바른 구매형태 정착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은 “기업은 그만큼 확실한 서비스를 보여줘야 하고, 소비자들은 기업의 개발과 생산,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인정해 줘야 한다”며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신뢰가 자리잡히지 않는다면 소비자와 기업은 모두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법 유통 근절에는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불법복제 소프트웨어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포상을 하는가 하면, 저작권을 침해하는 네티즌을 처벌할 용의도 밝혔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에는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발견 즉시 소비자들은 정보 공유라는 행동을 취한다. 결국 소비자들이 건전한 구매 의식을 갖는 것과 그것이 아깝지 않도록 기업이 혜택과 이익을 돌려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문보경기자@전자신문, okmun@

◆현장엔 늘 그들이 있다-프로슈머와 얼리어답터

 국내 한 중소업체의 이어폰 성능에 대한 호평이 미니기기 정보 사이트에 실렸다. 이 글이 전파되면서 순식간에 이어폰이 1000여개가 팔려나갔다. 그러나 구매자들은 좋다, 싫다에 그치지 않고 중저음이 약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사는 과감히 품질 개선에 착수했다. 성능보완에 따라 가격은 이전 제품에 비해 10% 가량 뛰었지만 매출을 전보다 더 늘었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평가와 아이디어를 통해 생산과정에도 깊이 관여하는 프로슈머의 모습이다.

 이 말은 앨빈 토플러가 ‘미래의 충격’이라는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다. 최근 들어서는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진 소비자라는 뜻에서 전문가(professional)와 소비자와의 조합으로도 쓰인다. 제품이나 시장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모색해 앞으로 문제들을 예측해 나가는 혁신적인(proactive) 소비집단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만큼 소비자들의 생산활동이 활발해졌다는 뜻이다.

 프로슈머들 못지않게 기업에 주요 요인으로 등장한 소비자군이 얼리 어답터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구매력이 있는 오피니언 리더 계층이며, 검증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해 타인에게 그 소감을 공개한다.

 얼리 어답터는 프로슈머와 적극적인 의견을 공유하며, 제품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데다 소비 자체를 즐긴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들의 활동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기업은 제품 성능에 대한 의견은 물론이고 마케팅, 광고 모델에 대해서도 묻기 시작했다.

 동양매직 구매자들의 모임인 ‘매직 패밀리’는 제품 활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홍보 대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기업이 광고 모델로 K씨를 고려하자, 주부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Y씨로 추천하기도 했다.

 LG전자는 가전 제품 개발시 소비자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는 과정을 거친다. 올림푸스한국은 디지털카메라를 새로 출시할 때 고객에게 먼저 시연하며, 가장 잘 찍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강연을 열기도 한다. 메인보드 전문업체인 빅빔은 소비자를 위한 커뮤니티 ‘빅스클럽’을 열고 고객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소비자들의 생산 참여 활동은 △고객의 소비 경험 증가 △네트워크의 발달 맞춤형 △대량 생산 능력의 발달에 따라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기업들도 이들의 의견을 듣고 생산에 반영하는 노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김찬호 한양대학교 교수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생산을 업그레이드할 뿐 아니라 정보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한다”고 설명했다.

문보경기자@전자신문, okm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