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부품업체 C사는 내비게이션용 텔렉메틱스 단말기를 개발해 독일 B사와 국내 대기업 A사에 각각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 기업 B사와 국내 대기업 A사는 같은 부품 수요업체임에도 불구하고 거래 관행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독일 업체는 제품 계약 이전부터 외주담당자가 명확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C사 납품개발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시한다. 그 결과, 제품 계약액은 14만 달러인데 반해 C사가 실제 개발에 투입한 비용은 6만 달러에 불과하다. 개당 납품가격도 110달러로 마진율이 25.5%에 달한다. 이처럼 납품기업에 적정이윤을 보장함으로써 기술개발과 품질향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이 회사 전략이다.
이에 반해 국내 대기업 외주 담당자는 부품납품 업체에 명확한 계획이나 목표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 결과, 계속적인 오류와 혼선이 발생해 개발 기간이나 비용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C사는 27억원의 납품 계약을 지키기 위해 제품 개발에만 34억원의 비용을 투입해 많은 손해를 봤다.
산업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은 아직도 단기적인 경쟁력과 수익성에 집착해 협력 업체의 납품 단가 인하에만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라며 “이런 잘못된 관행이 국내 기업 간 상생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한다. 과거 상당수 국내 중소기업은 수직적 계열화로 인한 잘못된 거래 관행으로 하루아침에 회사 간판을 내려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혁신주도형 경제에서는 기업이 원하는 기술을 다른 협력업체들이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글로벌화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관련 기업 간 협력과 협업의 필요성(Globally compete, Locally collaborate:국제경쟁, 국내상생)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이달 ‘혁신클러스터 국제회의’ 행사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마쓰시마 가쓰모리 도쿄대 교수는 기업 간 상생 효과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일본 도요타를 꼽았다. 도요타는 핵심 부품기업들 대부분이 본사공장과 불과 2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부품업체의 비용절감 효과를 납품단가 인하로 흡수하지 않고 부품기업이 이익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고, 부품업체들은 기술개발과 시설투자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도요타의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 부품 공급업체들이 도요타에 자동차 설계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마쓰시마 교수는 “정보와 지식의 집착성(stickiness) 때문에 기업 및 관련기관이 서로 협력해야 시너지가 일어난다”라며 “특히 정보기술(IT)·PC·제약 등 하이테크 산업 가운데 모듈화(module)화가 크게 진전된 산업에는 클러스터화를 통해 기업 간 상생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충고했다.
이런 세계적 추세를 타고 국내 기업들도 최근 들어 단순한 투자자금 지원이나 경영기법 교육 등 ‘물리적 상생’ 수준을 뛰어넘어 핵심부품 공동개발, 해외 동반 진출 등 화학적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
국내 상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휴대폰 제조 분야다. 휴대폰을 생산하는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에 등록된 협력업체 수만 해도 부품 505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개발업체 169개사 등 총 670여 개에 달한다. 지난 2003년부터 삼성전자는 이들 협력업체에 연간 1조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휴대폰 시장은 이미 삼성전자와 노키아 간 경쟁이라기보다는 삼성전자 협업 네트워크와 노키아 네트워크 간 경쟁이다.
중소 부품·소재 업체들은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대기업과 협력해 신제품을 개발하고 원가경쟁력을 높이기도 한다. 휴대폰 사출케이스를 생산하는 참테크는 지난해 10월까지 삼성전자와 공동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한 뒤 생산성 향상 및 품질개선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생산성은 22% 향상됐고 공정불량은 58% 개선하는 성과를 이뤘다. 알에프텍도 삼성전자로부터 테스트 장비와 개발 프로그램을 지원받아 외국에서 전량 수입해 오던 GSM 휴대폰 충전기를 자체 개발했다.
휴대폰 케이스를 공급하는 진원전자는 LG전자로부터 19억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중국 현지공장을 설립, 지난 4월부터 휴대폰 케이스 현지 생산에 들어갔다. 강인현 진원전자 사장은 “일찍이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시장 진출을 꿈꿔 왔다”라며 “자금·기술지원 등 LG전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경영기법을 전수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제조업 전반에 첨단 협업시스템을 도입하는 제조혁신전략(i-매뉴팩처링)도 기업 간 상생을 유도하는 핵심 도구로 떠오르고 있다. i-메뉴팩처링은 제품 기획부터 개발·설계·구매·생산·서비스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협업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제조업 혁신사업.
e-매뉴팩쳐링에서 한 단계 발전한 개념으로 정보(Information)·혁신(Innovation)·지능(Intelligence) 등을 두루 의미한다.
김기협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은 “IT 기술을 기반으로 제조산업 인프라를 연계하는 i-메뉴팩쳐링은 그 차제가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 간 상생 경영을 위한 협업 허브를 구축하는 대표적인 모범 사례”라고 설명했다.
경제 전문가들도 “지식기반 경제에서 미래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끼리도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상생협력의 네트워크 관계로 하루빨리 전환해야 한다”라며 “기업 간 상생은 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다.
주상돈기자@전자신문, sdjoo@
◆사례-알에프텍
휴대폰 충전기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알에프텍(대표 차정운 http://www.rftech.co.kr)은 대기업과의 윈윈 관계를 추구한 대표적인 성공모델로 꼽힌다. 알에프텍은 휴대폰 충전기와 핸즈프리 키트·데이터 링크 키트·텔레매틱스 단말기 부문에서 국내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유망 중소기업.
지난 2001년에 607억원이던 매출이 2002년 1150억원으로 늘어나면서 ‘1000억원 클럽’에 이름을 올린 이후 삼성전자와 윈윈 모델 개발실험을 지속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성쪽 기술자들이 직접 공장을 방문했고, 알에프텍 기술자들도 구미 삼성연구소를 수시로 찾았다.
그 결과, 이 회사는 삼성전자로부터 테스트 장비와 개발 프로그램을 지원받아 외국에서 전량 수입해 오던 GSM 휴대폰 충전기와 ‘토털 파워’(Total Power)라는 신개념 충전기를 개발하고 지난해까지 모두 671억원의 수입대체 효과를 냈다. 조그만 부품업체에서 출발해 대기업과의 상생으로 창업 10년 만에 ‘작은 거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물론 삼성전자의 협력업체 사랑이 일방(One-way)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알에프텍이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휴대폰 디자인 경쟁에서 삼성의 경쟁력을 높여 준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도 “알에프텍은 흔히 말하는 하도급업체가 아니라 삼성전자 신제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작업에 참여해 제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동반자”라고 말할 정도다.
알에프텍과 삼성전자의 기술협력은 경영협력으로까지 이어졌다. 알에프텍은 수주에서부터 최종 납품까지 모든 경영 과정을 전산화하는 ‘통합 정보화’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 삼성전자가 전문가까지 파견하면서 도움을 줬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알에프텍은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수여한 ‘제1회 대-중소기업협력대상 시상식’에서 단체부문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개최한 ‘삼성텔레콤 파트너스데이 2004’ 행사에서는 알에프텍이 국내 최우수 구매 협력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정운 알에프텍 사장은 “대·중소기업이 상생하려면 중소기업들도 자체 기술력 을 확보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서는 삼성전자가 추진하는 ‘1협력기업 1핵심기술 확보’ 전략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다양한 협력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