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는 단순한 권력 이동뿐 아니라 ‘경제 변혁’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후 등장한 군사정부는 이전 자유당 정권과는 달리 정부 정책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전자산업을 국가를 재건할 사업으로 결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민간 기업을 지원했다. 이에 국내 2차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를 지원할 과학기술처, 경제기획원 등의 정부 부처들도 속속 생겨났다.
◇5·16과 정부 주도의 전자산업=5·16 이후 설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세웠던 경제 정책의 골간은 △기간 산업의 건설 확립 △수출 무역의 진흥 △국가 관리 기업체의 운영 합리화 등이었다. 이를 위해 군사정부는 1961년 하반기 정부 주도의 몇가지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조국 근대화의 최우선 정책과제로 추진하기로 한 전기 및 전화 보급 사업이었다. 이 사업으로 인해 여러 민간 기업이 전화·전기시설 생산에 뛰어 드는 등 국내 전자산업 생산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전화 촉진 정책과 관련해 1960년대 이후 국내 전기·통신 분야를 사실상 좌지우지하던 부처는 상공부 전기국과 체신부의 전무국이다. 상공부 전기국은 1960년대 중반까지 국산 라디오 산업 보호를 위한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법’을 비롯, 합리적인 공업 표준을 제시한 ‘공업표준화법’, 전기용품의 품질 관리에 역점을 둔 ‘전기사업법’ 등 여러 관련 법규 제정을 통해 국내 전자산업을 주도했다.
체신부 전무국 역시 지난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 조직 자체가 독립해 공사화될 때까지 1960년대 국내 전기통신산업 수요 창출의 중심지가 됐다. 전화기·교환기·케이블 등의 수요는 모두 전무국을 통해 창출됐다.
민간 기업 진출도 가속화됐다. 금성사는 ‘회사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해 한국전력에 공급할 적산전력계와 체신부에 납품할 전화기 등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대한전선은 기술 제휴를 통해 냉장고·세탁기·TV 등의 신규 진출을 꾀했다.
◇경제기획원의 탄생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1년 7월 국가재건회의는 건설부 예산 기능(예산국)과 내무부 통계 기능(통계국)을 흡수해 일종의 수석 경제기구인 ‘경제기획원’으로 재출범시켰다. 이는 기존 정부 경제 기획 기능이 기획처와 부흥부 등에 분산돼 있어 강력한 정책 집행이 어려웠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함께 군사정부는 1962년 2월에는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기초 산업 유성 등을 골자로 하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을 국내·외에 천명했다.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외자 도입 강화 조치’다. 이 조치에서 군사정부는 전자산업 육성을 위해 외국 자본의 무제한 도입을 허용하고 정부가 도입과정에서 개입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다다익선’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입이 쉬운 차관 형태의 직접 투자가 많아져 원리금 상환 압박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군사 정부는 원천기술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제품 국산화를 위해 체계적인 공업 기술 기반 구축이 절실하다는 판단 아래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됐다. KIST가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베트남 파병에 따른 미국 정부 지원이 있었지만 결국 1963년 정부조직법 개정과 함께 과학기술처 출범으로 이어지는 등 결국 한국 과학기술을 한 단계 진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산 TV개발과 삼성의 등장=국산 TV 1호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66년 8월 1일이었다. 이날 금성사 부산 온천동 공장에서는 진공관 12개와 다이오드 5개를 장착한 19인치 흑백 TV ‘VD-191’ 100대가 첫 출하됐다. 이는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가 출시된 이후 7년 만이었다.
‘VD-191’의 소매 가격은 당시 미국산 제품에 비해 10만원 가량 싼 6만3510원이었다. 이런 가격이 가능한 것은 수입 대체 국산품에 대한 정부의 배려 때문이었다. 정부의 국산 산업 육성에 대한 의지로 이 TV는 생산 5개월 만에 국내 점유율 10%를 달성했다.
흑백TV 생산은 콘덴서·저항기·브라운관 등 300여종이 넘는 전자부품 수요를 유발하는 전자산업의 총아였다. 이런 점에서 TV 국내 생산은 영상 매체 시대 개막과 함께 전자부품 산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삼성전자의 등장이다. 삼성은 1969년 초 그동안 삼성물산 개발부에서 추진하던 전자사업을 전담할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자본금 6억원에 출범시켰다. 단순 중계 사업만을 위해 설립된 삼성전자의 위상은 그해 5월 삼성물산과 일본 산요전기가 합작한 ‘삼성산요전기’가 설립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원과 울주 등 2곳에 생산 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등 삼성산요는 그해 연간 TV 30만대, 라디오 410만대 등을 생산하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1970년 일본전기(NEC)와 합작해 삼성NEC(현 SDI)를 설립하는 등 1970년대 금성사와 치열해 벌일 ‘가전 전쟁’을 차근히 준비하고 있었다.
▲인물평전-박정희과 전자산업
박정희는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일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로 몰아 18명의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모두 51억2682만원의 환수액을 통보했다.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의 자본금이 6억원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액수였다.
하지만 이 조치는 이전 자유당 정부와 관계가 깊었던 대기업 길들이기 차원이었고 실제 박정희는 당시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대기업 부활과 국내 생산 기반 확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군사 정부는 임시특례법을 마련해 현금 납부 대신 공장을 지은 다음 설립 자본금 중에서 환수금 만큼 주식을 납부하면 환수액을 면제해줬다. 이 조치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금성사 등 많은 대기업이 국내 공장을 건설하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군사 정부는 당시 한국전쟁 이후 전무하던 국내 전자산업 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물론 ‘반공’을 국시로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당시 설립된 정책과 설비 시설이 향후 70년대 고도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군사 정부는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법’ ‘농어촌전화촉진법’ 등 국내 기업을 지원하는 많은 법안을 만들었다. 이에 금성사, 대한전선 등의 기업이 짧은 시간 안에 외산 제품을 누르고 국내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정권은 농어촌 라디오, TV보내기 운동 등 정책적으로 국내 업체를 지원한다. 이는 향후 10여년간 진행될 정부 주도 경제 부흥 정책의 시작으로 향후 경제기획원,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처 등 이를 지원하는 정부 부처 설립으로 이어진다. 특히 1967년에 설립된 과학기술처는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최초의 과학기술전담부처였다.
이 시기 박정희의 최대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1969년 1월부터 시행된 ‘전자공업법’의 제정이다. 1962년부터 추진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이전 자유당 정부가 구상한 것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정부 경제정책 방향을 ‘재건’에서 ‘개발’로 바꾸면서 국내 산업을 지원했다.
‘전자공업법’은 전자산업을 국가 중추 산업으로 육성함으로써 산업 설비 및 기술의 근대화, 국민 경제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 제정의 취지였다. 이와 함께 군사정부는 중장기 진흥 계획인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이 계획은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는 1976년까지 정부 전자산업 진흥계획이 정리된 일종의 백년대계로 인정받게 된다.
▲사진으로 보는 역사-최초 국산 선풍기
1960년대 많은 가전 제품들이 국산화됐다. 1960년 선풍기가 국산화됐고 1965년에는 국산 1호 냉장고 ‘GR-120’이 금성사에서 출시됐다. 또 국산 TV도 선보였는데 19인치 흑백TV ‘VD-191’이 그것이었다. 물론 국산화라고 해봐야 핵심 부품을 외국에서 수입해 조립하는 수준이었지만 외국이 아닌 국내 브랜드로 제품이 양산·공급된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특히, 이들 제품 대부분이 금성사를 통해 출시되는 등 금성사는 이 시기 국내 가전 업계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중 선풍기는 의미있는 제품이었다. 모터와 버튼을 장착한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향후 20∼30년간 서민들의 더위를 식혀줄 가전 제품에서 없어서는 안될 황제 취급을 받았다. 선풍기 개발 과정에도 금성사는 중심에 있었다.
선풍기의 경우 금성사는 1960년 초 쇠파이프를 휘어 몸통을 만든 국산 1호 제품 ‘D-301’을 개발했지만 이듬해 단종시키고 △각도 조절과 상하 작동이 가능한 선풍기 △키보드식 버튼 선풍기 △로터리식 타어머 장착 선풍기 등 다양한 업그레이드 제품을 내놨다.
단시간에 이런 업그레이드 제품 양산이 가능했던 것은 금성사의 대단위 전자 공장 때문이었다. 금성사는 부산시 온천동에 2만7000여평의 대단위 종합 전자 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온천동 공장은 적산전력계만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전자산업의 미래를 밝게 본 구인회 회장의 결단으로 TV·라디오·냉장고·전화기 등 종합 전자기기 생산시설용으로 확대한 것이다. 시설 자금은 서독 후어마이스터사가 제공한 차관 500만마르크(125만달러 상당)이었는 데 이는 군부 정권의 ‘외자 유치 운용 방침’이 적용된 민간 차관 1호였다.
1964년 3월 1차 완공된 온천동 공장의 월간 생산량은 전산전력계 4만6000개, 라디오 3만대, 전화기 1만8000대, 선풍기 3000대 등으로 당시 국내에서 이에 견줄만한 시설이 없었다. 금성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69년까지 온천동 공장을 11개 동에서 19개 동으로 증축하는 등 가전 제품 생산의 전초기지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