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7)국산화 열풍과 전자산업의 시련

[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7)국산화 열풍과 전자산업의 시련

1973년 세계 경제를 경악하게 했던 제1차 석유파동은 1975년부터 진정됐다. 석유파동을 겪은 전자업계는 성장성에 역점을 둔 유망품목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5년 당시의 전자산업 주종품목은 반도체 조립 26%, 흑백TV 21%, 녹음기 3%, 앰프 38%의 수준이었다. 이들 품목이 향후에도 성장을 주도해 나갈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었다.

 1976년 한국무역협회는 세계적인 경영컨설팅회사 ADL(Arthur D. Little)에 ‘우리나라의 전자산업 장기전망’의 용역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가전제품에서는 컬러TV와 VCR 등이, 산업용 기기에서는 사설전자식교환기(PBX), 컴퓨터 및 주변기기 등 모두 24개 품목이 유망품목으로 제시됐다. 조사보고서가 밑거름으로 작용하면서 성장 유망품목 개발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망품목 국산화 열풍=1970년대 중반 흑백TV 생산업체는 13개, 생산규모는 연간 100만대를 넘어섰다. 컬러TV 생산은 1974년 아남산업과 일본의 내쇼날전기가 합작으로 설립한 한국내쇼날에서 2만9000대를 생산, 전량 수출한 것이 최초다. 이어 한국크라운전자가 컬러TV 생산에 나섰지만 1976년 중단돼 컬러TV 산업은 활성화의 길로 접어들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77년 삼성전자가 미국 RCA와 컬러TV 기본특허 계약을 해 같은 해 4월 14인치 300대를 생산, 파나마로 수출하면서 산업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금성사도 그 해 RCA와 계약, 1977년 6월 생산라인 설치를 완료하고 8월 19인치 컬러TV 생산에 들어갔다.

 컬러TV 생산은 한국내쇼날, 삼성전자, 금성사 등의 3사 체제가 되면서 1977년 수출물량이 11만대에 이르렀고 1978년 대한전선이 RCA와 협력, 이에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양산경쟁시대에 돌입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자교환기 생산도 이 무렵에 이뤄졌다. 1976년 2월 KIST를 통해 전자교환방식의 타당성 검토가 시작됐고 1977년엔 한국전자통신이 회사를 설립, 미국 ITT·벨기에 BTM과 기술도입 계약을 하고 사업에 착수했다.

 이와는 별도로 1977년 삼성전자가 GTE와 합작으로 PWM(Pulse Width Modulation) 방식의 전자교환기 생산에 들어갔고, 이어 금성통신과 동양정밀이 각각 PAM방식의 전자교환기를, 대한통신이 크로스 바 교환기를 개발 및 생산하게 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현 전자통신연구원)도 전자교환기의 연구·개발에 나섰다. 이 결과 1989년엔 최초로 전자교환기를 필리핀에 수출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산업용기기의 발전에 한 획이 그어졌다.

 가전제품 가운데 컬러TV에 이어 인접 기술발전 및 완제품 수요창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VCR은 1978년부터 연구돼 오다 1979년 7월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기계식 VCR를 개발했다. 일본·서독·네덜란드에 이은 세계 4번째 쾌거였다. 그러나 이 제품은 양산되지 않았고 1980년에 전자식VCR가 개발되기 시작해 1981년에 양산에 들어갔다.

 업계는 NTSC방식의 VCR 생산을 위해 미국 RCA와, VHS방식을 채택을 위해 일본 JVC와 특허사용 계약을 1982년 하는 등 개발 및 양산 활성화를 위한 행보에 나섰다.

 ◇전자산업의 시련=제1차 석유파동을 이겨내고 회복에서 호황국면으로 접어든 국내외 경제는 5년 만에 다시 찾아온 제2차 석유파동을 맞아 급속 냉각상태로 반전됐다. 1978년 12.7달러로 안정세를 보이던 유가는 그해 말 이란사태로 말미암은 원유수출 중단으로 1979년 24달러, 1981년 34달러까지 치솟으며 세계경제를 뒤흔들었다.

 원유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경제에 직격탄을 맞았다. 여기에 1979년 10·26사태로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불안과 혼란은 가중돼 우리나라 산업경제는 크나큰 시련에 직면했다. 이는 1980년 국가경제 성장률 -4.8%에 비해 전자산업은 -13.1%로 후퇴하는 등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본격화된 신보호무역주의와 선진국의 수입규제는 자립발전의 기반을 닦고 있던 우리 산업경제에 심각한 위협요소로 작용했다. 영국은 1977년 7월 한국산 흑백TV의 수입규제에 들어갔고, 미국은 1978년 12월부터 1980년 6월까지 컬러TV를, 프랑스는 1979년 라디오 수입을 규제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자산업 수출은 1970년 5500만달러, 1972년 1억달러, 1976년 10억달러, 1978년 13억6000만달러 등으로 급신장하고 있었으나 흑백TV, 컬러TV, 라디오 등의 제품이 대표적인 수입규제 품목으로 부상하면서 우리 전자산업은 첫 시련기에 직면했다.

 

◆전자교환기 시대 개막

 우리나라 전자산업사에서 컬러TV에 이어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된 것은 전자교환기였다. 1970년대 중반 정부는 전자산업 진흥체제 구축과 더불어 전자교환기 도입과 이에 대한 국산화를 우선과제로 삼았다.

 전화보급대수를 늘리는 최대 관건이 교환시설의 현대화로 지목됨에 따라 정부는 1972년 경제장관회의에서 결정된 1976년 이후의 기계식교환기 추가도입 건을 무효화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전자교환기를 도입하기로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자교환기의 국내 개발을 위한 검토도 이뤄졌다. 1974년 5월 체신부는 전자교환방식공동추진계획을 수립해 산하연구기관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 내에 금성통신과 동양정밀 등 업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전자교환연구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국산화를 타진했다.

 기술자립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기술진을 총동원해서라도 독자기술로 교환기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년 후인 1976년 2월 경제장관간담회에서 시분할방식(TDM) 전자교환기를 직접 개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전자교환기 국산화 이전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외산 전자교환기 도입관련 실무를 맡았고 1976년 3월 국제입찰을 실시, ITT/BTM이 최종 낙찰됐다. 계약 직후 도입 전자교환기의 국내 조립생산을 담당할 한국전자통신은 소속 연구원 100여명을 벨기에 BTM 본사에 파견, 최신 전자교환기 기술습득 작업에 착수했다.

 1978년 6월 벨기에로부터 1차분 2만회선을 들여와 영동전화국과 당산전화국에 1만회선씩 설치되면서 비록 외산이긴 했지만 국내에도 전자교환기 시대가 열렸다. 한편 KIST부설 외곽 연구조직으로 발족됐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977년말로 소속이 체신부로 바뀌면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로 거듭났다. 이로써 국산전자교환기 개발을 위한 준비는 모두 마쳤다.

 

◆국내 최초 컬러 TV 금성사 ‘CT-808’

1976년 우리나라 흑백TV 보급률은 90%에 달했다. 방송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흑백방송만을 고집했다. 컬러TV를 사치품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국민 소득 1500달러에 불과한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한 정책이었다. 정부는 컬러TV 판매나 방영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금성사는 컬러TV 방송에 대비, 기술훈련용이라는 이름으로 컬러TV 시작품을 개발한다. 이어 생산라인 설치가 이뤄지고, 그해 7했다. 이어 시제품 개발에 들어가 그해 8월 국내 최초의 19인치 컬러 TV ‘ CT-808’을 생산한다. 구미공장 설계실의 주도로 개발된 컬러TV는 미국 RCA의 원천특허 사용권을 빌려쓰고 히다치와 마쯔시다의 TV를 그대로 카피해 만들어 졌다. 컬러TV에 관한 개발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개발팀 상황도 열악했다. 자체 기술이 부족하다보니 미국 RCA사에 상당부분 의존해야 하는 ‘기술 식민지’의 설움도 많이 겪었다. TV 품질수준을 확신할 수 없어 일본의 품질인증 규격을 기준으로 자체 품질검증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끝에 77년 8월 금성사는 국내 최초로 북미지역에 컬러TV 수출하게 된다.

최정훈기자@전자신문, jh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