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자산업은 5공화국 탄생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우민(愚民) 정책’으로 일컫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3S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3S는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 또는 스피드(speed)를 뜻한다. 당시 불안한 정치 문제로부터 국민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시행한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컬러TV 방송과 프로야구단 출범, 통금 해제 등이다. 특히 컬러TV 방송을 중심으로한 스크린 정책은 국내 전자산업의 고도화 기반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컬러TV 시대 본격 개막=컬러TV 방송은 3, 4공화국 당시 지속적으로 검토됐으나 시기와 방법 등을 놓고 지체되면서 방영이 계속 미뤄졌다.
5공화국에 접어들면서 컬러TV 방영이 검토될 당시인 80년 6월 업계 일각에서 방송 방식을 PAL 방식으로 시행하자는 건의가 일어나면서 잠시 혼란을 빚었으나 기존 NTSC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같은 해 8월 1일부터 컬러TV 시판이 허용됐다.
그러나 국내 방영은 결정되지 않아 유일한 컬러 방송이었던 미군의 AFKN 시청용에 한정돼 판매가 늘어나지 않았다. 업계의 줄기찬 요청에 따라 80년 12월 1일부터 역사적인 컬러TV 방영이 실시됐다. 컬러TV 시대가 드디어 열린 것이다. 표참조
이때부터 가전업계는 ‘국산화’라는 타이틀을 달기 시작했으며 해외 시장 진출도 가속화됐다.
컬러TV 확산에 불을 붙인 핵심 콘텐츠는 ‘스포츠’였다. 5공화국에 들어선 80년대 초반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프로축구, 민속씨름, 실업배구, 실업농구 등이 붐을 이루면서 스포츠 만능시대에 진입했다. 특히, 프로야구는 그동안 고교야구에 머물던 국내 야구를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다양한 볼거리를 컬러로 시청하면서 컬러TV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당시 컬러TV 시장은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양분하면서 신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해 80년 이후 3∼4년간 수십종의 신모델이 쏟아져나왔다.
◇VCR·디지털 오디오 국산화 스타트=일본산 제품이 판을 치던 VCR 시장에도 국산화 시대가 열렸다. 82년 국내 가전 업계의 노력 끝에 일본 JVC사로부터 VHS 방식의 VCR 제조 기술을 도입한 이후 정부와 기업들의 노력 끝에 84년 국산화율을 65%까지 끌어올렸다.
이때부터 가전의 수출 물꼬도 함께 트였다. 85년 처음으로 2억달러 수출을 일궈냈으며 87년에 13억달러를 넘어서는 등 수출 주력 품목으로 급부상했다.
VCR 시장의 성장 이면에는 성인 비디오물과 불법 포르노 테이프의 대량 유포 등이 한 몫했다. 전두환 정권의 스크린 정책 중에 ‘스크린’과 ‘섹스’가 결합, 성인 영화가 대량 제작되면서 이것이 다시 비디오 테이프 시장으로 전환돼 결과적으로 VCR의 대중화로 이어진 것이다.
83년 미국 시장에 디지털 오디오기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이후 일본 업체들이 저가형 제품을 출시하자 동원전자·LG전자·신아전자 등 국내 업체들도 뛰어들었다. 이때가 바로 휴대형 디지털 오디오 시대가 열린 시초였다.
문제는 역시 콘텐츠. 85년 휴대형 CDP를 국산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산 컴팩트 디스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 CD를 수입할 때도 개별적으로 음반협회 승인을 받아야하고 수입 관세율도 35%로 높아 이를 상품화하기 어려웠다.
이후 오디오 업계의 노력으로 수입 관세율을 연차적으로 낮추는 한편, 특별소비세를 84년 5월부터 잠정 세율을 적용받아 소형은 10%에서 1.0%로, 기타 제품은 25%에서 2.5%로 대폭 인하됐다. 업계가 CD 국산화에 매진하는 가운데 선경화학(현 SKC)이 CD 원판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CD 시장은 급팽창했다.
TV와 VCR, 오디오에 이르기까지 국산화 물결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다. 바로 ‘88 서울올림픽’. 상승세를 걷던 가전 업계가 이때를 기점으로 대형 업체로 발돋움하게 됐다. 본격적인 가전 전성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서동규기자@전자신문, dkseo@etnews.co.kr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반도체·통신 산업의 확대
5공화국은 가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 전반에 걸쳐 격변의 시기였다.
가장 큰 변화는 출연연구소의 통폐합. 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부터 시작된 출연연구소 출범은 79년말 15곳으로 늘어났다. 80년 12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사회 전반의 개혁’을 외치며 언론사 통폐합과 함께 출연연을 총 9개로 통폐합했다.
이에 따라 △KAIST △한국에너지연구소 △한국동력자원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 △한국전기기술연구소 등으로 묶였다. 당초 전문가들의 의견과 달리 기능이 변질되고 인력도 대폭 줄어들면서 연구소 발전이 몇년 뒤로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반해 산업계는 새로운 물꼬가 트인 시대다. 1981년 8월 삼성전자가 경기도 부천의 한국반도체 자리에 연건평 200평 규모의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고 해외로부터 관련 기술 도입을 시작하면서 반도체 신화 창조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80년대는 정보통신 기반이 마련됐다. 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출범했으며 이듬해인 82년에는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이 등장, 통신 업계 거두 업체가 만들어졌다. 84년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 개발, 87년 전화 1000만 회선 돌파, 88년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 운영 등 통신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이때 일어났다.
◆국내 첫 개인용 컴퓨터 ‘SPC-1000’
삼성전자는 정보화 총아로 각광받으며 보편화되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PC)의 자체 개발에 착수, 1982년 12월 8비트 PC인 ‘SPC-1000’을 개발하고 83년 2월부터 시판에 들어갔다.
이 PC는 값이 싼 교육용과 일반 업무용 PC로서 특히 학교 교육용으로 많이 보급됐다. 카세트를 내장, 프로그램 운영이 손쉽고 HU베이직이 초보자에게 편리해 인기가 높았다.
84년 10월부터 16비트 업무용 컴퓨터인 ‘SPC-3000’ 시리즈를 생산했다. 이 제품은 국내 동일 기종 중 국산화율 76%로서 가장 높았고, 한글·한자 및 영문 처리가 가능했다. 또한, IBM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호환이 가능했으며, 대형 컴퓨터의 한글 온라인 단말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등 단위 업무의 전산화와 사무자동화에 가장 적합한 기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87년 내놓은 32비트 PC인 SPC-6000은 당시 국내 최고의 업무 처리 속도를 가졌으며, 과학기술용 및 CAD/CAM 분야 등 엔지니어링 분야에 적합한 시스템이었다.
SPC-8000은 최고 수준의 32비트 중형 컴퓨터 시스템으로 사무자동화, 일반 업무 및 자료 처리에서 최대 22명의 사용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다기능 컴퓨터 시스템이다. SPC-8020은 캐비닛으로 더욱 쉽게 작동 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28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생산 첫해인 83년 PC를 1만7000대 생산했으나 86년부터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88년에는 20만5000대에 달했다. 86년부터 수출에도 나서 87년에는 7만2282대를 수출, 내수보다 수출이 판매를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서동규기자@전자신문, dkseo@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컬러·흑백 TV 국내 판매 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