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당시 전자산업계는 일대 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3저 시대의 갑작스런 붕괴, 노사분규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가파른 임금 상승 등 기업 채산성이 급속히 악화됐다. 그동안 수년간 고성장세를 달성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전자산업계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전자산업계는 이같은 위기를 오히려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그동안 저비용 위주의 안정적인 성장에서 고비용 생산체제를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에 집중하며 정면돌파에 나선 것이다. 이를 위해 도입한 것들이 △사업 다각화 △경영 내실화 △생산기지 해외이전 △공동자동화 △기업·정부와의 전략적 제휴 등이다. 지금으로서는 결코 새로울 것이 없는 전략들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과감한 변신 시도였다.
이같은 노력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특히 우리나라가 IT강국으로 급부상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반도체와 이동통신 사업으로 눈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됐다.
◇악재 속출로 전자산업 흔들=88년 올림픽 해를 맞아 국내외로 악재가 잇따랐다. 85년 이후 안정적인 3저시대를 유지하던 우리나라는 88년에 들어서면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가 크게 요동치면 흔들리기 시작했다. 85년 9월 892.2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88년 말 684.1원까지 상승하더니 89년 4월에는 666.3원으로 무려 85년 9월 대비 33.9%가 절상됐다.
원화절상은 시발에 불과했다. 87년 6·29선언이 발표된 이후 근로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그동안 잠잠하던 노사분규가 속출했다. LG전자 자료에 따르면 89년 1월에 발생한 파업은 총태업일수 124일, 파업일수 119일, 휴업일수 8일 등 사업장의 평균조업단축일수가 36일에 이르렀고 총 조업단축 일수는 무려 251일에 달했다. 이를 통해 매출 3882억원, 경상이익 808억원의 차질을 빚었다.
노사분규는 실적 악화 뿐만 아니라 임금상승으로 이어졌다. 특히 전자업계 임금 상승은 두드러졌다. 6·29선언 발표 다음해인 88년 32.0%를 시작으로 90년 17.2%, 91년 17.8% 등 95년까지 평균 16.0% 증가세를 기록했다. 이는 경쟁국인 일본(2.6%)·대만(7.7%)보다 훨씬 높아 대외경쟁력 약화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고비용 생산체제로=국내 주요 전자업계는 잇따른 악재로 경영에 심각한 애로를 겪었으며 변신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우선 고부가가치산업을 중심으로 사업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삼성전자·LG전자·대우전자 등 종합 전자업체들은 멀티미디어나 방송기기, 차세대 전지, LCD 등 신규사업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는 특히 당시까지 이들 기업들의 주력사업이던 가전부문의 수익성과 성장성이 쇠퇴하는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이어서 기업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활발하지 않았던 공동사업도 활기를 띠었다. 경쟁이 심화하면서 상호경쟁만이 아닌 협력이 생존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정부와 업계는 한국 전자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구조고도화가 시급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반도체·컴퓨터·HDTV·LCD 등 차세대 핵심제품에 대한 공동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경영내실화를 위한 노력도 이뤄졌다. 전자업계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그동안 확장일로에서 과감한 조정을 시도했다. 임원조직의 축소, 유사부서 통폐합, 팀제 도입 등을 통해 혁신을 시도했다. 또한 기존 사업중에서 수익성이 없는 한계사업은 과감히 정리하는 결단의 모습도 나타났다.
삼성전자·LG전자 등 전자업체들은 카메라·복사기·카세트·오디오·전기밥솥·전기다리미 등 국내 임금수준 상승으로 경쟁력이 약화한 품목을 과감히 중소기업으로 이전했다. 공장자동화도 본격화됐다. 자동조립기·자동권선기 등 공정 단위의 자동화와 산업용 로봇 등의 보급이 시작됐다.
◆국내 최초의 비디오카메라 금성사 ‘GVC-6000’
국내 최초 비디오카메라인 ‘GVC-6000’은 1981년 1월 금성사(현 LG전자)가 개발에 착수해 정확히 만 1년 후인 82년 1월에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9월부터는 양산에 들어가 그해 11월29일에는 71대를 생산, 출하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맞춰 개발한 이 제품은 소형 경량급으로 휴대가 간편하고 소비전력도 6W에 불과해 기술적으로 손색이 없다는 호평을 받았다.
금성사가 이처럼 기술적으로 검증된 비디오카메라를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VCR의 개발을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금성사는 78년 10월부터 VCR의 개발에 착수해 81년 5월에 시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VCR기술을 응용한다면 비디오카메라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 VCR 완성단계인 81년부터 비디오카메라 개발에 착수해 1년만에 완성의 기쁨을 누렸다.
금성사는 국내 최초의 비디오카메라 개발을 바탕으로 85년 6월에는 일본 히다치전자와 방송용 기자재 전반에 대한 기술제휴에 합의했으며 이를 통해 방송용 고성능 카메라인 컴퓨터캠(GK-97)을 생산하기도 했다. GK-97은 각종 기능을 완전 자동 조정함으로써 당시 촬영전의 화상조정에 30분가량 소요되던 것을 단 2분 만에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주요 내부회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모니터에 문자로 표시하는 고장 진단기능까지 갖추고 있어 오작동에 의해 화질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이동통신산업 개화
올림픽이 개최된 88년은 한국에서 이동통신산업이 본격 개화한 해로 기록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동전화기가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 정도로만 인식돼, 크게 보급되지 않았다. 88년 말까지만 해도 이동전화가입자수는 불과 2만353명에 그쳤으며 90년까지도 8만명 정도였다.
90년대 중반부터 성장세는 가히 폭발적으로 늘었다. 계기가 된 것은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 등 선두 전자업체들이 국산단말기를 연달아 출시하면서부터다. 국산단말기가 쏟아지면서 가격이 크게 인하됐고 서서히 휴대폰이 대중속으로 확산한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 기술을 독자적으로 채택해 성공한 점, 그리고 기존의 아날로그방식 서비스로 독점하던 이동전화사업을 디지털방식으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경쟁을 한 것도 중요한 계기였다.
이동통신시장 급성장과 관련해서 ‘애니콜 신화’로 대변되는 삼성전자의 눈부신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전자는 88년 9월 아날로그 휴대폰인 SH-100을 내놓으면서 휴대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국내 시장을 석권하다시피한 모토로라의 벽을 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소형화와 경량화를 추구하는 한편 독자개발한 더블 안테나를 채용해 통화성공률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배터리 성능을 높이고 디자인을 고급화해 고품격 휴대폰으로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삼성전자가 휴대폰 사업에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국산 제품으로는 최초로 100g대의 휴대폰인 SH-700을 93년 10월 내놓으면서부터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과 ‘애니콜’이란 브랜드명을 내세운 SH-770으로 높기만 했던 모토로라 아성을 무너뜨렸다. 95년 8월 국내시장점유율 1위는 51.5%의 삼성전자였으며, 모토로라는 42.1%로 2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 격차는 이후 더욱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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