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10)정보통신산업의 발전

삼성전자가 1996년 국내 최초로 CDMA 휴대폰(모델명 SCH-100)을 본격 출시함으로써 한국이 CDMA를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기여했다.
삼성전자가 1996년 국내 최초로 CDMA 휴대폰(모델명 SCH-100)을 본격 출시함으로써 한국이 CDMA를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기여했다.

1990년 대 한국전자산업은 정보통신 사업 발전과 유관 산업의 성장 시대로 요약된다.

 디지털 전전자 교환기 국산화를 계기로 국내 전화 가입자수가 2000만을 넘어섰으며, 무선호출·이동전화 서비스 사업자의 추가 모집으로 경쟁체제가 구축되면서, 이동통신 관련 제품들의 기술 혁명이 일어났다. 이동통신서비스 가입자가 유선전화가입자를 넘어서는 초유의 사건도 이즈음에 일어난다. 여기에 케이블TV, 디지털 방송 등 차세대 멀티미디어 시대를 향한 걸음도 계속됐다.

◇TDX시리즈 개발과 전화가입자 2000만 명 돌파=1991년 순수 우리기술로 개발된 시분할방식교환기 ‘TDX-10’은 우리나라 통신서비스의 품질을 올려놓은 대명사다. 대용량 디지털 전전자 교환기가 만들어져 유선전화에 사용됐으며, 이를 토대로 무선호출 교환기, CDMA 교환기 등 다양한 응용 제품이 탄생했다. 우리나라 통신발전의 원동력은 바로 ‘TDX-10’이었다. 개발주역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와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금성반도체 등이었다.

이 교환기가 국산화되면서 우리나라는 1992년 이후 연간 3000억 원의 수입 대체 효과를 거뒀다. 1998년에는 국내에서 동영상 전화나 데이터통신 등 멀티미디어 전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TDX-100’이 개발됐다. 개도국을 대상으로 통신장비 해외수출도 성사됐다. 1991년 540만 달러의 TDX교환기를 필리핀에 수출한 것으로 시작으로 베트남, 몽골, 러시아 일부 지역등에 통신서비스 사업진출도 이뤄졌다.

1998년에는 음성과 영상을 동시에 교환할 수 있는 비동기전송방식 차세대 광대역교환기(ATM교환기)가 개발돼 ATM교환기 시대를 열었다. 교환기술이 발전하면서 전화가입자도 함께 늘었다. 1988년 1000만을 넘어선 전화가입자는 불과 10년도 못돼 2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97년에는 2040만 명을 돌파해 세계 9위의 전화 시설 보유국으로 급성장했다.

◇이동통신산업의 부상=88올림픽 이후 이동통신서비스 확산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동통신서비스는 CDMA와 TDMA 논쟁으로 시작됐다. 논란 끝에 CDMA방식이 표준으로 채택됐다. 1991년 미국 퀄컴과 CDMA 디지털 셀룰러 시스템 공동 개발 계약을 체결했고 1993년 최초 국산 시제품(KCS-1: Korea CDMA System)이 완성됐다. 1996년 4월부터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CDMA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1997년은 국내 이동통신 사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해였다. 기존 이동전화와 무선 호출 서비스에 한정됐던 이동통신 서비스에 개인휴대통신(PCS), 발신전용 휴대전화(CT-2), 무선 데이터 서비스가 추가된 것이다. 1997년 말 주요 이동통신 서비스 가입자는 2268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동통신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국내 휴대폰 수출도 본격화된다. 국내 CDMA서비스가 성공하고 미국, 홍콩 등도 CDMA방식을 도입하면서 국내 휴대폰 수출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1989년 1억4700만 달러였던 국내 휴대폰 수출액은 1997년 8억5300만 달러를 급증, 주요 휴대폰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이동통신분야 발전의 원동력은 단연 정부출연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었다. ETRI는 ‘TDX-10’을 개발한 데 이어 CDMA 서비스도 상용화하는 등 국내 이동통신 분야를 이끌었다. 이 시기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대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이동통신사업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렸다는 이유로 일명 ‘정보통신사관학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통신시장 개발과 유관 산업의 발전=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통신 협상이 개시된 것을 시작으로 세계 정보통신 시장은 급변했다. 국내 시장도 변화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1997년 IMF외환위기가 오면서 기간통신사업에 대한 외국인 주식소유한도가 확대되는 등 통신 시장 개방 속도가 빨라졌다.

한국통신에 의해 독점 운영되던 국내 기본 통신서비스는 신규 사업자의 진입을 허용하는 등 통신 사업 경쟁체제가 구축됐고 1997년에는 시내 전화의 경쟁 체제를 도입됐다. 이런 경쟁 체제 도입은 가격 하락으로 이러지면서 휴대폰 등 유관 산업 확대로 이어졌다.

1995년 3월 유선 방송이 선보이게 된다. 방송 서비스가 확대됨에 따라 이 시기 디지털 방송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됐다. 디지털TV 보급 일정도 속속 수립돼, 디지털TV의 개발이 급진전됐다. 고선명(HD) TV도 1991년부터 개발됐고 향후 국내 가전 업계를 주도해 갈 주력 상품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영웅은 준비된다.

삼성전자는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과의 통합을 통해, 가전·정보통신·반도체·컴퓨터 등 4대 부문을 향후 주력 사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 삼성전자 정보가전 사업은 1991년 6월 누계 생산 3000만대를 돌파하는 등 세계 정상권으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 성장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으로 비유된다. 1993년과 1994년에 내놓은 SH-700, SH-770로 국내 시장에서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던 모토롤라를 물리치는 애니콜신화를 창조한다. 10여년 간을 우리나라를 지배해온 모토롤라 휴대폰은 삼성의 공격적 마케팅앞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모토롤라가 무너지면서 삼성은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휴대폰 지배력을 높여 나간다. 제품 물량이 늘어나면서 삼성 휴대폰은 다양한 제품과 실험적인 디자인을 내놓으며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가장 큰 성과는 반도체 부분에서 나타났다. 1990년 8월 선진 업체와 동시에 16MB D램을 개발해 기술격차를 좁혔던 삼성은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선두 업체로 부상한다. 1996년 1월 1G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D램 반도체의 3세대 연속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화려한 금자탑을 쌓았다. 1995년에는 2조 5000억 원에 이르는 순익을 반도체 부문에서 달성하게 된다.

LG전자는 1990년대 들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 당시 금성사는 1989년부터 총합생산관리운동으로 위기 극복에 전념해, 합리적인 노사관계 정착을 이끌면서 창원 2공장, 구미 2공장 잇달아 준공했다. 1990년 국내 최초로 세탁기 총생산 500만 대 생산 기록을 시작으로 1991년 TV 총 생산 5000만대, 1995년에는 냉장고 출하 2000만대를 돌파하는 등 대표 가전 업체로 성장한다. .

1995년 세계 시장 공략을 위해 LG전자로 사명을 변경한 금성사는 2000년까지 유럽 연합(EU)지역에서 30억 달러의 매출을 목표로 CD-ROM 등 멀티미디어 기기의 유럽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다. LG전자는 1995년 9월 북잉글랜드 뉴캐슬 근교에 대규모 가전 제품 생산 공장을 준공, 연산 컬러TV 60만 대, 전자레인지 100만 대의 생산 능력을 갖췄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신흥시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중국과 인도등에 투자를 집중했다. 1994년 2억 달러를 투자, 중국에 현지공장을 설립한데 이어 1997년 인도 델리 근교에 컬러TV·냉장고 등을 생산하는 대규모 복합가전단지(LGEIL)를 건설했다.

◆사진으로 보는 전자산업 60년-삼성 반도체 세계 정상에 오르다.  

삼성반도체 역사는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1992년 9월 64MB D램, 1994년 8월 256MB D램 개발 모두 ‘세계 최초’였다. 관심을 끄는 것은 256MB D램이다. 이 제품 개발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은 글로벌 톱 수준에 오르게 된다.

256MB D램 개발팀이 결성되던 1992년 3월 삼성전자는 64MB D램 개발에 힘을 집중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개발책임자였던 황창규 박사(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는 개발 경험이 적은 젊은 인재로 팀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256MB D램 개발에는 3개 분야에 150여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작업은 우선 TD팀이 세부적인 사양을 정하면 설계팀이 설계도를 만들고 이 설계도를 기초로 공정 개발팀이 시작 라인에서 시제품을 생산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개발팀은 다른 경쟁사들이 직접 256MB D램 샘플을 제작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이미 개발돼 상용화되고 있던 16MB D램에 256MB D램 사양을 적용했다. 개발 착수 1년 만인 1993년 3월 256MB D램 디자인룰인 0.25미크론과 유사한 0.28미크론급의 16MB D램 설계가 완료됐고, 그해 말 256MB D램 기능을 완전히 갖춘 16MB D램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16MB D램 샘플에서 256MB D램 개발 가능성을 확인한 개발팀은 1994년 8월 2억7000만 개의 셀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0.25미크론 급 256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쾌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