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복제하는 나노로봇 ‘괴물’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노기술 선구자인 리처드 스몰리(1996년 노벨화학상 수상)는 2003년 12월 에릭 드렉슬러의 나노로봇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원자나 분자를 조립하는 기계’가 등장해 궁극적으로 자기를 복제하는 나노로봇이 되리라는 드렉슬러의 시각이 크게 잘못됐다는 것.
드렉슬러는 분자조립기를 통해 그 어떤 물질이라도 싼값에 만들고, 심지어 불멸하는 생명체까지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또 분자조립기에 인공지능이 결합해 스스로 복제하는 나노로봇이 돼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단백질과 디옥시리보핵산(DNA)이 ‘끊임없이 존재’하며 생명의 근원을 이루듯,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자(나노로봇)가 스스로 복제하며 대를 잇고,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스몰리는 단호했다. 그는 “원자들 위치를 이리저리 조작한다고 해서 분자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드렉슬러의) 분자조립기는 화학을 모르는 허구”라며 “드렉슬러가 화학적으로 불가능한 분자조립기 위험성을 부각시켜 나노기술에 대한 불신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2003년 12월부터 본격화한 두 나노기술 거장의 논쟁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그 안에 나노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과 걱정, 치열한 과학적 성찰이 담겨있다. 물론 어느 과학자의 예측이 옳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1985년 9월, 스몰리는 흑연에 고에너지 레이저를 쪼였다. 이때 탄소 원자들이 60개씩 결합, 전에 없던 화합물(풀러렌)이 됐다. 나노기술이 과학계 본류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스몰리 박사가 지난 달 28일 암 투병 끝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풀러렌은 목표지향형 약물전달시스템으로 개발돼 암 등을 치료하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아버지(스몰리)를 구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