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리던 90년대의 전자업계가 1997년 11월 21일 당시로는 낯선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메가톤급 폭탄을 맞으면서 격랑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80년대 말부터 급상승한 임금·금리·지가 등으로 국가 전체적으로 경쟁력이 약화한데다 96년 말 노동계 파업 등으로 한차례 몸살을 겪으면서 한보·대농·삼미·진로 등 대기업의 잇따라 부도로 총체적 부실을 맞이했다. 이때 정부가 부도기업 구제를 위해 부도유예협약을 시행한데다 당시 동남아 국가의 외환위기로 인한 금융권 부실과 외화 차입난이 심화되면서 IMF에 구제기금을 요청, 총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이때부터 산업계 전반에 걸쳐 구조조정이 시작되는 아픔을 겪었다.
◇총체적 위기 = IMF 한파가 몰아닥치자 내수시장이 급속히 냉각됐다. 기업구조 조정에 따른 실업급증과 소득이 많이 줄어든데다 심리적인 불안감이 겹치면서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것이다. TV·VCR·오디오 등 당시 주요 가전제품은 물론 모든 산업의 내수경기가 30% 이상 급감했다. 소비 심리 위축은 다시 투자축소로 직결돼 이로인한 수입도 크게 감소했다. 그 결과, IMF 환란이 발생한 이듬해인 1998년 수입은 전년 대비 24.2%나 줄어들었다. 수출용 원자재의 수입도 감소, 수출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은 시기였다. 반면, 청소년을 상대로 이동전화 보급이 급증한 시기여서 휴대폰 등 일부 품목은 기형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전자산업의 수출은 90년대 들어 IMF 환란 이전까지 총 7년간 평균 11.1% 성장하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에는 6.7%가 감소, 사상 최고의 감소율을 나타냈다.
당시 한국상품 이미지가 크게 하락한데다 원화가치마저 떨어지면서 반도체·CDT·VCR·HDD 등 수출 주력품목의 단가가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또, 우리 수출 시장의 3분1을 차지했던 아시아 시장이 대부분 외환위기로 수요가 위축된데다 1998년 7월, 신흥 시장인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함으로써 수출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높은 부채비율 등으로 허덕이던 제조업체들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됐다. 원가가치의 하락과 금리상승으로 자금난을 이기지 못한 중소기업의 부도가 속출, 일부 부품이 단종되는가 하면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관련 하청기업들이 문을 닫는 연쇄부도로 이어졌다. 1997년 11월 IMF 반발과 함께 전자업계로는 처음으로 해태전자가 부도를 냈으며 뒤따라 큐닉스컴퓨터·태일정밀·제일정밀·한주전자 등도 ‘부도’라는 배에 올라 타야만했다. 결국, 1997년에는 전년보다 340.4% 증가한 458개사가 부도를 냈고 이듬해에는 전년 대비 70.5%가 증가한 781개 업체가 부도를 냈다.
기업이 어려워지면서 대규모 인력감축으로 이어져 기업들의 강제적인 정리해고가 빈발했다. 이로 인해 1999년 1월은 실업자 176만명이 발생, 실업률이 8.5%에 달하는 등 33년 만에 최고의 실업률을 나타냈다.
◇전자업계의 수출로 위기 탈출= 위기 탈출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가속화됐다. 금융시장 안정화·에너지 절감·고용 안정·중소기업 경영안정 등 경제종합대책을 수립해 추진했고 주요 부처를 중심으로 대책반을 운영했다. 당시 외자유치를 통한 활로를 모색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 마련됐다. 이 같은 노력이 힘입어 외국인 투자가 1년 새에 27%가 증가했고 전자분야는 역대 최고치인 14억달러를 유치, 전년 대비 372% 증가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올렸다.
업계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전자업계는 전자산업진흥회 내에 IMF 대책반을 설치 운영했으며 정부에 대해 △무역금융 개선 △특소세 인하 △수입국 다변화 해제품목 연장 등을 건의했다. 그 결과, 1998년 7월 내수활성화를 위해 VCR·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가전제품에 대해 기본세율의 30%에 해당하는 탄력세율을 1년간 적용키로 결정했다. 무역자유화 조치로 1998년 말로 종료키로 했던 TV·이동전화기·전기밥솥 등 전자제품에 대한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도 1999년 6월로 연장했다.
전자업계 자구책 마련도 치열했다. 기업합병·인원감축·인건비 삭감·자산매각·한계사업 정리 등 구조조정을 강행, 기업경영 구조를 개선했다. 1997년 46만명에 달한 전자업계 종업원 수가 이듬해엔 39만 명으로 13%가 감소했다. 부채비율도 100%P 가량 낮췄다. 정부도 산업계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반도체·가전 등 일부 산업이 과잉 중복투자된다고 판단, 반도체와 가전에 대한 빅딜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1년 만에 LG반도체와 현대전자가 통합키로 한 반면 대우전자와 삼성전자의 빅딜은 끝내 무산됐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실마리는 결국 ‘수출’에서 잡혔다. 1998년 다양한 노력을 겪은 이후 1999년부터 수출이 증가하고 내수판매가 빠르게 회복됐다. 다양한 신제품과 정보통신 분야가 고도화되면서 수출 주력품으로 떠올랐으며 전자산업이 전체 산업의 경기회복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IMF라는 먹구름 사이로 실 낯 같은 희망이 새어나오면서 2000년대가 밝아갔다.
◆대우의 흥망성쇠
IMF를 기점으로 운명이 극을 달린 대표적인 전자기업을 꼽으라면 단연 ‘대우전자’이다.
1974년 1월 설립된 대우전자는 1983년 3월 대한전선의 가전사업을 인수하면서 대우그룹의 주력사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외환위기라는 회오리를 맞아 그룹 전체가 흔들리면서 1999년 8월 결국 대우그룹 해체라는 결과를 낳게된다. 이때 12개 핵심계열사 중 하나인 대우전자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대우전자는 지난 2000년 10월 워크아웃을 졸업하기까지 여러 고초를 겪었다. 대우전자는 IMF가 터진 직후, 1998년 1월 가전업체의 팔·다리라고 할 수 있는 국내영업과 서비스 부문을 분리시켰다. 당시 국내영업부문은 한국신용유통(추후 하이마트)으로 이관했으며 서비스부문은 대우전자서비스(현 대우일렉서비스)라는 새로운 법인을 설립, 분리시켰다.
2002년 11월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사명을 변경하고 새로운 가전사로 거듭날 때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영상·냉기·리빙 등 대우전자의 우량사업 부문을 선별 인수했으며 이후 채권단 지원으로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춰나갔다. 지난해 말에는 전 제품 라인업을 갖추고 현재 매각을 적극 추진하는 등 변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전자산업 60년…세계 최초 30인치 초대형 TFT LCD
IMF 환란이 불어닥친 1997년 11월, 삼성전자는 역사적인 ‘개발’에 성공한다. 대형 벽걸이 TV와 고해상도 멀티미디어 화상 표시장치의 차세대 제품으로 사용될 30인치 급 초대형 TFT LCD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제품은 1995년 22인치 제품을 개발한 이후 약 10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어 이뤄낸 역작이다. 일반 32인치 급 TV와 비슷한 화면 크기에 디지털TV보다 더욱 선명한 화면을 제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당시로는 대형 LCD 패널 개발의 기술적 한계로 여겨졌던 30인치 벽을 깬 것이어서 그 의미는 남달랐다. 이전까지 일본 일부 업체가 한 장의 패널을 이용해 20인치대 제품을 개발한 적이 있었으나 30인치대는 삼성전자가 세계 처음으로 스타트를 끊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을 개발하면서 초고해상도 대형 디스플레이 관련 핵심기술과 30인치급 이상 대면적 액정주입기술 등 대화면 제품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을 확보, 18건 이상의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기흥과 천안에 구축된 양산체제와 함께 초대형 TFT LCD 분야의 기술개발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관련 분야에서 부각되는 기반을 마련하게된 때이다.
이 제품은 1998년 11월 전자제품 수출사상 최고가인 대당 3만 달러에 미국에 수출돼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가격은 당시 고급 승용차 3대 가격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세계 TFT LCD 시장에서 일본 샤프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D램 반도체 이후 세계 시장을 정복한 두 번째 제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