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5억명. 1인당 건전지 한개씩만 소비하더라도 15억개가 쓰여지는 나라. 영국이나 일본처럼 국민 2인당 1대꼴의 자동차 보급율이면 무려 7억5000만대가 팔릴 수 있는 소비 대국.
그 중국에 한국 IT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난달 11일 베이징 서북쪽지역인 석경산구의 신흥 번화가 중심의 만상화원프라자에 들어선 초대형 통신기기 매장은 주말을 맞아 가족단위로 휴대폰을 구입하러 나온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뤘다.
중국인 특유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흥정인지, 말싸움인지 모를 분위기에서도 삼성·LG·팬택·VK 등 한국산 휴대폰 모델은 ‘명품’ 대접을 받고 있었다.
구매자나 판매자 모두 하나같이 한국산 휴대폰이 ‘최고’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창리 매장 총지배인은 “산요, 노키아 등 모델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고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한국산 모델”이라며 “디자인 성능 가격 색감 모두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고 말했다.
매장에서 만난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 김순영 씨는 “고향사람들끼리는 ‘조국상품’하면서 한국 제품을 선호한다”며 “문물에 민감한 중국인들도 나라를 떠나 한국산 제품에 많이 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매장은 지난 10월 매장 단독행사로 20여대 물량의 한국산 휴대폰 특가행사를 진행했다가,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공안으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삼성·LG 등 한국 기업들도 휴대폰은 물론 가전제품 전반에 대해 생활 밀착형 광고를 앞다퉈 내보내고 있다. 천안문과 베이징역 등 베이징 중심부를 관통하는 장안대로는 거의 한국기업들이 광고를 장악하다시피한 형국이다.
주요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 광장입구 등에 눈 돌리는 곳마다 낯익은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휴대폰 광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요즘 LG는 에어컨 냉장고 김치냉장고 등 생활 가전 광고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오는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은 한국 IT기업들에게 더 없이 좋은 시장기회가 될 전망이다. 중국에서 한국IT기업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실무직원들은 요즘 “70년대 한국 경제가 베트남전쟁으로 일어났다면, 21세기 첫 황금시장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될것”이라고 흥분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변두리 지역 정도로 여겨졌을 법한 석경산구도 구 전체가 ‘레노베이션’을 하듯 새옷을 갈아입는 건설작업으로 분주하다. 거의 빈땅이 없을 정도로 새건물이 올라가고, 그 주택이나 공공시설 등이 모두 IT제품으로 새롭게 꾸며져야 한다.
최근 중국 정부는 올림픽 때 몰려들 외국인의 눈길을 의식해서인 듯, 공공기관이나 인구밀집지역 주요 시설물내 안내 및 홍보용 설비를 대형 LCD모니터로 설치토록 의무화하는 방안까지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관문인 베이징 수도국제공항에만 들어서도 그 변화는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입국장은 물론 대합실 모든 디스플레이가 LCD로 바뀐지 오래다.
작은 휴대폰에서부터 공공기관 IT설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회가 활짝 열리고 있다.
방송·연예분야서 시작된 한류가 진정한 IT 한류로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출효과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생산기지’로서 역할했던 중국이 ‘세계의 소비대국’으로 변하고 있다. 그 중요한 기회를 잡기 위한 한국 IT기업의 질주가 신년벽두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인터뷰-최덕만 KT차이나 사장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싼 시장입니다.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통해 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철저한 손익계산이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덤볐다간 백전백패입니다.”
최근 2년여 KT재팬 근무 기간을 제외하면 지난 93년부터 중국시장을 10년 넘게 경험한 베테랑 최덕만 KT차이나 사장은 여전히 중국시장에 대해 “어렵다”고 말한다. ‘기회의 땅’인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을 노리는 한국 IT기업들에게 조언할 것도 너무 많다.
“일본시장은 오히려 한국 IT 제품이 먹힐 수 있는 어느정도 환경이 됩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우리 제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나 색다른 아이디어에 값을 치르려는 중국인들의 소비행태가 너무 인색합니다.”
그래서 최 사장이 내세우는 핵심 대안은 ‘포지셔닝(위치설정)’이다. 해당 제품의 시장에서의 위치, 소비자의 범위 및 목표치, 동종의 해외제품과 비교했을 때의 위치 등 모든 것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사람도 많고 하니 어중간하게만 하면 팔릴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단정한다.
“최근 수년간 지속돼온 급성장으로 인해 신흥갑부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상대로한 ‘로열 마케팅’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대졸 초임 임금에 맞춘 저가전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 1명 억제 정책이 낳은 ‘제왕적 자녀’를 위한 타깃마케팅도 가능합니다. 상황과 제품특성에 맞게 정확히 타깃을 정해서 들어와야 합니다.”
KT차이나 또한 중국시장에 대한 특정 타깃화의 선례를 갖고 있다. 지난 95년초 무선사업자인 차이나유니콤과 안위성에서 지분 투자까지 들어간 공동사업을 전개하다 나중에 손을 뗐다.
별로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후 유니콤은 경쟁사인 SK텔레콤과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KT는 오히려 차이나넷콤(CNC)와 전략적인 우호관계를 높였다. 인프라 위에 망관리시스템, 부가서비스 및 콘텐츠솔루션, 플랫폼 등을 팔아야하는 KT로서는 CNC가 더 유익한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성공한 사업 사례로는 현대자동차와 포철을 꼽고 싶습니다. 현대자동차는 폭스바겐 등 굴지의 자동차회사들이 20∼30년전부터 합작사를 통해 들어와있는 중국시장에, 96년부터 뛰어들어 그야말로 ‘압축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포철도 2008 베이징올림픽 건설 수요에 딱맞는 시장전략을 펼쳤습니다. 고급 철강의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며 없어서 못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베이징내 한국 사업자 모임인 ‘한국상회’에 정례적으로 참가한다는 최 사장은 한국기업끼리 중국시장에서 뭉쳐야할 이유를 ‘정보’와 ‘대정부 관계 증진’으로 꼽았다. 베이징(중국)=이진호기자@전자신문, jho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