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해 12월 16일. 전자신문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문화기술(CT)포럼이 결성한 공동조사단은 영국 남서부 브리스톨에 위치한 3C리서치를 방문했다. 3C리서치는 2003년 영국 무역산업부(DTI)로부터 762만 파운드(한화 132억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출범한 산학협력 연구소. 3C가 통신(Communications), 컴퓨팅(Computing), 콘텐츠(Content)를 뜻하는데서 알 수 있듯 콘텐츠와 IT를 접목하는게 주된 연구목표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전략센터에서는 어떤 일을 하십니까?” 3C리서치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기대하고 있던 조사단에게 피터 혼 CEO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설기환 진흥원 인력기술본부장이 “CT는 문화와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개념이며 한국은 국가 차원에서 이를 지원하고 있다”고 밝히자 피터 혼 CEO는 그제서야 “정확히 우리가 하는 일과 같으니 앞으로 협력할 일이 많겠다”면서 발표를 시작했다. 협력 가능성을 최우선시하는 3C리서치의 기본 목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에서 피터 혼 CEO는 “문화콘텐츠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최상단에 위치한 콘텐츠 자체와 밑단의 기술적 인프라를 모두 함께 고려해야한다”는 이른바 ‘톱 투 다운(top to down)’ 전략을 강조했다.
3C리서치는 브리스톨 대학과 콘텐츠 업체, 기술 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클러스터를 구성해 이같은 전략을 실현하고 있었다. CT에 있어 클러스터는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형태로 나타나는게 특징이다.
주요 프로젝트인 ‘모션 리퍼(Motion Ripper)’ 연구실을 찾았다. 브리스톨 대학 박사급 연구원 5명이 유럽 최대 TV프로그램 공급업체인 그라나다, 데이터 관리 업체인 매트릭스 데이터와 공동작업을 진행하면서 확실한 산학협력의 모범 사례를 보여줬다.
‘모션 리퍼’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에서 세부적인 동작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몇개의 포인트만으로 동작을 잡아내고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속 동작을 자동구현하는 기술이다. 신체에 직접 센서를 달지 않고 동영상에 포인트를 설정하므로 활용성이 매우 크다.
팀장인 브리스톨대 컴퓨터공학과의 닐 캠밸 박사는 “‘모션 리퍼’ 기술을 통해 일반적인 모션 캡쳐보다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면서 리얼 모션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다”며 “상업화를 노리는 TV프로그램 업체의 참여로 진행이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모션 리퍼’ 기술은 이미 BBC의 ‘자연 세계’ 시리즈의 대규모 병정 개미 이동 장면 구현에 사용된 바 있다. 영상물에서 동작을 잡아내는 기술이 아주 획기적인 것은 아니다. 국내에도 관련 기술이 개발돼 있다. 하지만 단순 기술개발에서 그치지 않고 애니메이션 동작의 특성에 맞게 이를 커스터마이징하고 완벽하게 자동화함으로써 실제 제작에 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문화기술(CT)에서 목표와 방향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했다.
‘실제 활용될 기술을 개발한다’는 전략은 특정 부분만 자동으로 렌더링 처리해주는 ‘렌더링 온 디멘드(Rendering on Demand)’ 프로젝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연구실에서 만난 앨런 챌머 박사는 우리에게 3D 공간으로 구성된 방을 지나가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의 갯수를 유심히 세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화면이 다 지나간 후에 돌아온 질문은 “바닥이 무슨 색이었냐”는 것. 황당해하는 우리에게 챌머 박사는 “연필에 집중했으니 바닥을 보지 못한 건 당연하다”며 “‘RoD’ 프로젝트는 이처럼 사람의 눈이 완벽하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3D 공간을 만들 때 집중해서 보는 부분은 확실한 렌더링 처리로 그래픽 품질을 높이고 그 외의 부분은 렌더링을 하지 않아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RoD’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이같은 프로젝트는 기술을 필요로하는 콘텐츠 업계의 필요를 모른다면 절대 나올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선인터넷망에서도 유선망에서의 콘텐츠 전송효율을 구현한다는 ‘오시리스(OSIRIS)’ 프로젝트 연구실에서 놀란 사실은 도시바와 ST마이크로를 비롯해 무려 6개 기업의 연구원이 한 프로젝트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특이한 건 이들이 ‘콘텐츠 전송효율 극대화’라는 공통된 목표를 내세우면서도 각기 다른 세부 기술에도 집중하면서 프로젝트 중간중간 수시로 상용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업화를 최우선시하는 3C리서치의 특징이다.
프로젝트 매니저 게라인트 존스는 “3C리서치 전문 심사 그룹이 프로젝트를 선정할 때 가장 주목하는게 상업화 가능성”이라며 “빠른 상용화야말로 개발비용의 50% 이상을 내면서도 3C리서치에 많은 업체가 참여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지적재산권 등 프로젝트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철저하게 프로젝트 참여자가 소유한다는 점도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많은 연구실과 프로젝트를 둘러보면서 기술 개발에 확실한 목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CT에 있어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놓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내에 콘텐츠 분야를 모아놓은 클러스터는 존재하지만 IT업체와 학교가 함께하는 클러스터는 아직 없다는 점에서 클러스터로 승부하는 영국의 성공사례를 수용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피터 혼 3C리서치 CEO는 “한국은 초고속인터넷망과 같은 기본 IT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디지털 콘텐츠 기술을 적용하는 테스트베드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며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스> 영국은 CT를 위한 네트워킹의 천국
이번 출장에서 방문했던 영국 남부 지역은 대부분 클러스터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브라이톤 지역의 와이어드서섹스(Wired Sussex)는 영국 남동부 지역의 1200여 디지털 미디어 기업을 회원으로 등록하고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를 개발해 DTI나 남동잉글랜드개발청(SEEDA) 등으로부터 자금을 따오는 역할을 한다. 또 디스케이프(dSCAPE)라는 디지털 콘텐츠 쇼케이스를 열어 ‘만남의 장’을 마련했다.
와이어드서섹스의 닉 언더힐 대표는 “콘텐츠 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개개인의 창조적인 능력이지만 급속히 디지털화하는 산업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IT업계 혹은 동종업계와의 긴밀한 네트워킹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헤이스팅 지역의 크리에이티브미디어센터(CMC)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을 집중지원하는 인큐베이팅 센터다. SEEDA와 유럽지역개발기금(ERDF)의 자금지원으로 탄생했다. 특히, 문화콘텐츠 기업 뿐 아니라 문화콘텐츠 기업을 지원하는 기술업체들까지 입주시킴으로써 양측간 교류기회를 제공하고 브라이톤 대학과의 산학협력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