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으로 떠나는 여행]#5

옛날 옛날, 지금으로부터 몇 만년 전 오직 생존을 위한 사냥 외에는 아무런 생각 없던 원시인들이 기묘한 일을 시작했다.

동굴벽에 기묘한 모양들을 새겨나가는 이 일은 생존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이른바 예술이라는 문화를 탄생시켰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후일 만화라 불리는 문화의 탄생이기도 했다.모습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간략화시켜 구성하는 만화.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력에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부터 19세기에 시작된 현대 만화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만화라는 예술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그려내는 형태로 발전했다.

그리고 1930년대 디즈니 만화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 어메이징 스토리즈(Amazing Stories)라 불리던 초기의 SF 양식을 본 딴 만화가 하나 등장했다. 외계에서 날아온 청년이 쫄쫄이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래서 “새인가? 비행기인가? 아니 슈퍼맨이다!”라는 대사를 유행시키기도 했던 그 작품. 물론, 캡틴 퓨처니 뭐니 하는 모험물들이 유행한 것도 말할 필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만화, 그리고 만화 영화의 역사와 더불어 SF도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변두리 문화다. 빼빼 마른 몸매에 빙글빙글 안경을 걸치고 뭔지 모를 소리만 지껄이는, 속칭 안경잡이광들만 보는 그런 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바다 건너 작은 섬나라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03년 한 소년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수십 년 전-지금은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한 작가의 손에 의해 탄생한 그 소년은 외계에서 날아온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능력을 지니고 변신하는 슈퍼 영웅도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소년이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원자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아톰이라 불린 소년은 1952년 만화를 통해 데뷔했지만 그로부터 11년 뒤에야 안경잡이광의 세계를 벗어나 대중에게 인식되었다. 바로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를 통해 패션 미술관에 장식된 아톰. 그야말로 한 문화의 상징이 아닐까?

탄생의 해를 기념하여 아톰은 리메이크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속칭, 재패니메이션의 시초라고 알려진 작품 ‘철완 아톰’(1963)은 총 193화에 이르는 분량으로도 놀랍지만, TV애니의 상업적 가능성 그리고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다.

데츠카 오사무라는 성공한 만화가의 재력과 능력이 없었다면 결코 등장할 수 없었을 이 애니메이션은 당시 일본의 소년, 소녀들을 열광하게 만들었고 이제껏 주변 문화, 혹은 들러리 문화(실례로 미키마우스 같은 초기의 애니메이션은 단독으로 상영되지 않고 다른 영화에 부록으로 딸려나갔다)에 지나지 않던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대중 문화로 변모시켰다(데츠카 오사무의 TV 애니메이션은 속칭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으로도 유명하다.1950년대 당시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의 전신상을 매번 다르게 그리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데츠카 오사무는 몸통은 그대로 두고 팔과 다리만 따라 움직이거나 말할 때는 입이나 눈만 움직이는 식으로 일부분만 따로 그리는 방법으로 비용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도입하여 지금도 무수한 작품이 쏟아지는 재패니메이션을 탄생시켰다).

같은 해, 국내에서는 60권짜리 만화 삼국지로 잘 알려진 요코야마 미츠데루씨의 ‘철인 28호’가 상영되면서 TV를 중심으로 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거인의 별’이니 ‘내일의 죠’ 같은 작품이 등장하는 가운데, 일본 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수 많은 나라의 TV 화면을 사로 잡은 작품이 등장했으니 바로 열혈이 넘치는-그래서 응원가로도 널리 사용되는- 노래의 작품 ‘마징가 Z’(1972)였다. ‘철인 28호’나 ‘자이언트 로보’처럼 밖에서 조종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직접 탑승해서 조종한다는 개념으로 신선한 분위기를 전해준 이 작품은 슈퍼 로봇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고 열혈 로봇물의 가능성을 낳았다.

그리하여 3단 합체에 의해 각기 다른 로봇이 탄생하는 ‘게타 로보’(1974), 완구 회사를 위해서 탄생했다고 할만한 초 전자 합체의 ‘콤바트라 V’(1976) 등이 선보이며 슈퍼 로봇의 붐을 계승해 나가고 있을 무렵. 한편으로는 ‘사이보그 009’(1968), ‘바다의 트리톤’(1972), ‘바빌 2세’(1973) 등의 작품들이 TV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1977년 재방영된 ‘우주전함 야마토’를 통해서 이제껏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던 애니메이션이 20대 형님팬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다음 해.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 속에 길이 남는 걸작 3편이 동시에 소개되었으니 일본 프라모델 산업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자랑하는 ‘기동전사 건담’과 무한한 모험의 이야기와 수많은 신비로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한 작품 ‘은하철도 999’ 그리고 물에 잠긴 미래 세계의 독특한 세계관을 창조한 ‘미래소년 코난’이다.

리얼 로봇의 효시로서 수많은 형님들의 낭만을 불러온 ‘기동전사 건담’은 작품 이면의 설정에 대한 관심을 불러오며 오타쿠라는 문화를 탄생시켰고, ‘은하철도 999’는 ‘하록 선장’ ‘천년여왕’ 등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모험을 통하여 우주에서 펼쳐지는 낭만을 흥미롭게 전개해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기를 끌었던 것은 후일 ‘천공의 성 라퓨타’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등을 통해 재패니메이션의 꿈을 현실화한 미야자키 감독의 ‘미래 소년 코난’.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물에 잠긴 세계에서 펼쳐지는 소년의 모험담을 그린 이 이야기는 마니아층을 넘어 대중에 어필하면서 애니메이션 음반이 100만장 이상 판매되는 대성공을 누리기도 했다.“푸른 바다 저 멀리~”로 시작되는 노래는 국내의 시청자들도 사로잡아서 그 후 응원가 등으로 널리 불리게 되는데 번안곡이 넘쳐나던 애니메이션 음악 중에서 몇 안 되는 우리나라의 창작 노래이기도 하다. 따라서, 100만장 판매된 음반의 오프닝과 우리나라의 오프닝은 완전히 다르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78년을 지나 오타쿠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80년대. TV를 장식했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였다. 우주에서 날아온 거대한 우주 전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전쟁 밖에는 모르고 살아가던 거인 종족이 인간들의 문화라는 것을 접함으로서 전개되는 ‘문명의 충격’을 소재로 했다.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디자인의 메카닉과 그 설정으로서 사람들을 사로 잡았다.

‘아톰’을 시작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TV 속의 SF 애니메이션. 그것은 ‘레이짱’ 붐으로 오타쿠들의 천국을 구축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대표되는 90년대를 거쳐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CG의 도입으로 창조의 가능성이 늘어나고 캐릭터 상품의 붐으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서 매주 수 십편의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고 있다.

한때, 만화 속에만 등장하던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 TV 세계는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SF로 시작하여 SF로 발전해온 TV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우리들에게 상상력의 바다가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우리 앞에 선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상상의 세계 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즐겁게 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리라 본다. TV의 세계는 그야말로 무궁한 미래가 감추어져 있으니까.‘철인 28호’의 요코야마씨가 탄생시킨 초인물 ‘바빌 2세(원래는 ‘바벨 2세’지만, 예고편의 식자가 잘못되는 바람에 ‘바빌 2세’로 바뀌고 말았다)’에서는 염동력 외에도 에너지 충격파니 화염 능력이니 하는 다채로운 기술들을 선보였는데 놀랍게도 주인공 바벨 2세보다 악당인 요미가 더 약하다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왔다.

국내에서는 방송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방영될 당시 수많은 팬들은 매회마다 “요미! 힘내라!”라고 악당을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강력한 조직과 기술, 그리고 능력으로 바벨 2세에게 도전하면서도 결국 처참하게 박살 나고 마는, 그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시 도전하는 요미의 모습은 그야말로 진정한 악당의 귀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잡혀있는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덫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의리 있는 면모도 보여주었기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기도 했다.SF 칼럼리스트. 게임 아카데미에서 SF 소재론을 강의 중이며, 띵 소프트에서 스토리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SF WAR 클럽(www.joysf.com)이란 팬 페이지로 유명하다.

[사진설명] 순서대로...

◇ 여기서 시작되었을까? SF만화는

◇ 패션 미술관에 장식된 아톰. 그야말로 한 문화의 상징이 아닐까?

◇ `푸르바다 저 멀리~`로 시작되는 노래는 지금도 응원가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 최근 실사화되기도 한 철인 28호. 거대 로봇이 활약한 최초의 에니메이션이다.

◇ 3명의 시도와 함께 대결하는 `바벨 2세` 놀랍게도 악당이 더 약하다

◇ 70년대 우리나라에도 이런 훌륭한 작품이 있었다. `로보트 태권V` (1976)

◇ `마징가Z`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3대 슈퍼로봇

◇ 건담 붐은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극장판 `Z건담`

◇ 수많은 전함보다 한 소녀의 노래가 더 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 오타쿠 붐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

◇ TV 속엔 수많은 상상의 보고가 숨겨져 있다.

<전홍식 pyodogi@sfwa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