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 그 중에서도 수도 파리에 위치한 퐁피두센터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복합 문화공간이다. 그러나 문화기술(CT) 공동조사단이 방문한 퐁피두센터 산하 ‘음악·음향의 탐구와 조정 연구소(IRCAM)’는 이름부터 생소했다.
“IRCAM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음악과 과학을 조합해 음악적인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곳입니다. 소리와 연결되는 모든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IRCAM의 디렉터 앙드레 상텔리씨가 공동조사단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같이 소개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IRCAM은 1970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G. 퐁피두가 유명 작곡가 피아 볼레즈에게 “‘미래를 지향하는 음악 연구소’를 설립해달라”고 요청하면서 탄생했다. 이후 IRCAM은 1976년에 디지털 사운드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등 디지털 음악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앞선 기술을 선보인다. 30년이라는 역사도 놀랍지만 대통령이 직접 음악 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는게 더욱 놀라웠다.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대외협력담당관인 뱅상 퓌그씨의 안내에 따라 본격적인 시설 탐방을 시작했다. 연구시설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달랐다. “90여명의 엔지니어는 대부분 수학이나 컴퓨터 전공입니다.” 퓌그씨의 설명이다. 음악을 연구하는 곳인데 연구원들은 대부분 과학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팀을 총괄하는 위그 비네씨는 “IRCAM에서 진행하는 모든 기술개발은 철저하게 예술적 창조를 기반으로 한다”며 “예술가들과 항상 긴밀하게 협의를 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기 때문에 IRCAM이 독보적인 위상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과학자이면서 음악가인 구성원이 많아지고 있다”고 부연했다.
마침 스튜디오에서 실시간 음악 변환툴로 작업중인 한 엔지니어에게 물어보니 그 역시 컴퓨터 전공이면서 본인이 작곡한 음악이 10개가 넘을 정도로 예술적 감성도 지니고 있었다.
잠시 후 자그마한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벽면을 가득 채운 패널이 다양한 각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천장까지 오르내린다.
이곳은 어떤 공연에 어떤 형태의 벽면을 구성해야 가장 훌륭한 음향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공간이었다. 각각의 패널이 움직일 수 있는 각도가 수십 단계에 이르고 천장의 높낮이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최적의 음향을 찾기 위한 조합에는 한계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페라나 클래식, 대중음악 등등 다양한 장르별 전용극장이 지어지고 있지만 사실상 개별 장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음향시설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반면 프랑스는 이미 30년 전부터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최적의 음향을 찾는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이런 차이가 바로 문화예술의 경쟁력 차이로 드러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퓌그씨가 자랑스럽게 소개한 다음 시설은 예상외로 연구실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 이곳에는 수십 년도 더 된 음악 관련 서적이 수천 권 비치돼 있다. 한 페이지에 20개 이상의 악기가 수록된 오케스트라 악보부터 음악의 문학화나 심리적 분석을 표현한 각종 이론서까지. “예술적 감수성과 이론의 토대 위에 기술도 발전한다”는게 퓌그씨의 확신이다.
IRCAM은 철저하게 예술적인 창조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상업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적인 마인드를 가장 잘 아는 곳이기에 상업적인 성공도 믿을 수 있다. 하드디스크 기반의 차세대 하이파이 시스템을 개발하는 시맨틱 하이파이(Semantic HiFi) 프로젝트가 대표적. 소니 컴퓨터공학연구소가 30%를 투자해 공동진행하는 이 프로젝트는 모든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에 인터넷 주소를 부여해 유저와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이미 음악 검색부터 분석, 분류, 개인화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시제품이 나왔으며 소니에 의해 본격적인 상용화가 진행중이다.
IRCAM의 한해 예산은 1100만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30억원 정도다. 음악, 그것도 기술적인 측면에만 투입하기에는 다소 많은 액수로도 보인다. 하지만 ‘아트가 중심이다’라는 확실한 컨셉 하에 최하단부터 CT를 발전시켜나가는 모습에서 왜 프랑스가 문화 강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앙드레 상텔리 IRCAM 디렉터
“문화와 기술을 접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IRCAM의 디렉터 앙드레 상텔리씨는 자신들도 처음에는 서로 다른 분야의 접목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놨다. 상텔리씨는 “예술가와 기술자는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일단 의사소통에서 문제가 생겼다”며 “초기에는 무조건 자주 같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간극을 줄이는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어디에 주안점을 두느냐’다. 상텔리 씨는 “설립자가 작곡가인데서 알 수 있듯 IRCAM은 철저하게 기술을 활용해 예술을 발전시키는데 목표를 뒀다”며 “때문에 초기에는 기술자들이 예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했고 결과는 이렇듯 훌륭하다”고 자랑했다.
그는 “예술가 역시 IRCAM을 통해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면서 “이들 모두는 이제 컴퓨터를 활용해 음악의 미래 언어를 만드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으며 자신들의 능력으로 안 되는 부분은 기술자들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예술의 가치를 인정해주면서 기술로써 이를 발전시켜나간다면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 상당한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설명이다. 상텔리씨는 “시맨틱 하이파이 프로젝트에서 소니와 협력하는 것처럼 한국과도 언제든지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한국의 발전한 IT와 프랑스의 예술적 토대가 좋은 만남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