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술년은 여느 해와 많이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새해에는 모두 희망에 들뜨기 마련입니다.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저마다 크고 작은 소망을 가슴에 품습니다. 희망에 부풀어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한 해를 설계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술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난 연말에 불거진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의혹에 온 관심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농민단체의 홍콩 원정 시위와 구속 사태에도 가슴을 졸였습니다. 된다 안 된다 밀고 당기는 사학법 개정 파동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인터넷TV가 서로 자기 관할이라고 우기는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양보없는 설전에 짜증스러웠습니다. 저작권자 주권이니 사용자 주권이니 하는 저작권법 개정에 인터넷이 시끄러웠습니다. 개혁과 보수에 뉴라이트와 뉴레프트까지 가세해 갈피를 못 잡을 지경입니다. X파일에 이어 줄기세포 조작 사건마저 거대 세력에 의한 황우석 죽이기라는 소리도 들립니다. PD수첩에 대항한 동네수첩까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닙니다.
음모론은 불신(不信)을 먹고 자랍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드러난 액면을 그대로 믿지 못할수록 ’이것이 바로 그 속내’라는 음모론에 혹하기 쉽습니다. 황 박사의 솔직하지 못한 처신은 불신과 음모론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황 박사는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밝혀야 했습니다. 노성일 미즈메디 원장의 양심선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줄기세포가 조작됐다고 온 국민 앞에서 밝힌 지 얼마되지 않아 오히려 자신이 그 의혹의 중심에 서버렸습니다.
정통부와 방송위는 국민 편익과 산업발전을 위해 새 통신방송융합법안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국민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통·방 융합이라는 신개발지구에다 서로 ‘알박기’를 먼저 하려는 속내라고 여길 것입니다. 국민을 대변하겠다며 나선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광위나 과기정위나 자기 관할 영역인 방송위와 정통부의 편을 들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비리사학 근절, 사학건립이념 파괴라는 명분으로 한치의 양보없는 싸움을 펼치는 정치권과 교육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이 하는 주장과 속내가 다를 것이라는 게 일반인의 생각입니다.
산업자원부는 ‘메이드인 코리아’ 표기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농수산물에서 전자제품 등으로 적용 대상을 크게 확대하고 부품의 50% 이상이 국산으로 채용돼야 메이드인 코리아를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브랜드를 높이고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랍니다. 관련 업계는 물론이고 소비자도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외국산 부품을 50% 이상 적용해 국내에서 제조한 제품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마 ‘메이드인 유령’이 되지 않을까요.
한국인의 손재주가 줄기세포, 아니 배반포를 만들어낸 비결이라고 치켜세운 지 얼마나 됐습니까. 지상 최대 과제라던 해외자본 유치나 동북아 허브 건설은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국민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하면 무엇이든 알아볼 수도, 알아낼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젊은 과학도들이 전문가들도 넘긴 줄기세포 사진 조작을 밝혀내는 시대입니다. 더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내를 감출 수 없습니다. 세계 최고, 최강의 인터넷 강국에 사는 국민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치장하더라도 엑스레이보다 더 투명하게 속내를 들여다보는 IT 한국인입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집시다. 속내를 감출 수 없다면, 그래서 어차피 드러나기 마련이라면 아예 당당하게 밝히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야만 서로 믿음이 싹틀 수 있습니다. 불신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IT 코리아의 진면목은 기술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노센트코리아’도 함께 이루어내야 합니다.
유성호 논설위원@전자신문, sh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