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를 하는 자식과 함께 사는 A씨(68세·서울 송파). 2년전 아내를 잃고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때아닌 가정부 신세가 됐다. 아침 7시30분이면 자식 부부와 손자들까지 모두 밖으로 나가고 나면 집안 일은 모두 그의 차지다. 하지만, 정작 그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가정일을 하고나면 딱히 소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 노인정에 들러 화투를 하는 것도 이젠 재미없고 지루해졌다. 저녁이 되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오정’이다 뭐다해서 스트레스가 심한 자식 부부는 찌든 사회 생활의 피곤함 때문인지,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 버린다. 손주들은 PC에 매달릴 뿐 할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다. 하는 수 없이 TV를 켜보지만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다. A씨는 결국 오늘도 TV를 켜 놓은 채 잠이든다.
요즘 중산층 이하 ‘실버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핵 가족화가 가속화되고, 아파트 주거 문화가 확산되면서 노년층의 소외감이 점차 위험 수위를 향해 치닫고 있다.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지만, 노년층을 대상으로한 여가선용 인프라는 거꾸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노인정에 삼삼오오 쭈그리고 앉아 화투를 즐기는게 전부라는 푸념이 실버세대들에게서 터져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게임이 떠오르고 있다. 10∼20대 젊은층의 전유물로 간주돼왔던 게임이 실버세대 여가선용의 최적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게임은 매우 친숙하지 않은 뉴미디어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인프라가 탄탄히 갖춰져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웬만한 중산층 이하의 가정도 PC를 보유하고 있고 인터넷을 필수 수단으로 사용한다. 실버세대에 대한 정보화 교육이 기초 자치단체 단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식이나 손주 등 정보화세대를 통해 짧은 교육만으로도 간단한 게임 정도는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돼 있는게 사실이다.
게임이 실버세대의 여가 선용 수단으로 좋은 점은 모든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란 점 때문이다. 복잡한 키보드 자판을 잘 몰라도 마우스나 조이스틱 사용법만 익히면 바둑·오목·장기 등 간단한 보드게임 정도는 쉽게 접근 가능하다. 게임을 하게되면 가족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회복 또는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명지대학교 이장주교수는 최근 열린 게임정보화교육 성과발표에서 “게임은 지식 정보화 사회에 재미 그 이상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제하며 “대부분의 일상이 여가로 구성되어있는 노인들의 여가활용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고, ‘성공적인 노화(successful aging)’로 이끄는 중요한 매개가 다름아닌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게임은 특히 여가선용의 수단은 물론 노년층과 비노년층 간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활용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권장할만하다는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즉, 자식들과의 대화를 늘리는 매개체이자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게임은 노인들의 인지적 능력을 개발 및 유지함으로써 치매 등 노인병을 예방할 뿐더러 삶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유발, 제 2의 인생을 여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노인들 여가 선용과 삶의 질 문제 고심해야할 때>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울 만큼 한국경제가 초고속 성장을 거듭, 선진국 문턱까지 진입했지만, 그 반대급부는 적지않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핵가족화에 따른 저출산 문제와 고령화 사회로의 빠른 진입이다. 특히 1인당 GDP가 2만달러가 넘는 선진국 수준의 빠른 고령화로 인한 실버세대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인구 변천의 결과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해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지난 66년 3.7% 수준에서 2000년엔 7.1%에 달하며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로 들어섰다. 이런 추세라면 2019년 무렵엔 인구의 15% 정도가 노년층이 차지하는 초고령화사회로 진입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고령화 사회의 진입은 많은 사회·문화적 변동을 가져왔다. 수명연장과 근로기간 단축으로 ‘사오정’, ‘오륙도’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노인 인구의 증가로 연금수급문제, 노인 의료비 증대, 노인 부양 부담의 증가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다.
특히 독거 노인이 급증하면서 노인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여가선용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선진국에 진입할 수록 사회의 고령화는 불가피하다”고 전제하고 “노인병의 주 원인이 고독과 사회와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만큼 정부차원에서 노인 여가선용과 삶의 질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