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IT기업에게 ‘파트너 십’이란 주로 총판·재판매 업체(리셀러) 같은 유통 협력사와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바뀐 환경에서는 이 같은 비즈니스에 직접 관련이 있는 유통 업체 뿐 아니라 소비자·기업·정부와 관련해 새 역할 정립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마디로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부와 지역 사회, 나아가 다른 경쟁 기업과 든든한 파트너 십이 있어야 생존과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IBM·HP·인텔 등은 부분적이지만 대외협력· 사회공헌 팀을 구성하고 지역 사회 발전에 나서거나 정부 부처와 공동으로 정보 소외 계층을 위한 다양한 정보화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부족하다. 지금의 다국적 기업은 그 이상의 역할을 요구 받고 있다. 한국EMC 김경진 대표는 지난해 한국 진출 10주년을 맞아 부담 반, 각오 반으로 “10년 후에도 뿌리 내린 기업이 되려면 지역 사회와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새로 선임된 외국기업협회 신박제 회장(필립스전자 사장)도 취임사에서 “정부와 직접 대화 채널을 강화해 대정부 건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선진 경영 기업을 국내에 정착하고 외자 유치, 일자리 창출에도 힘 쏟겠다”고 말했다.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 단순히 제품만 공급한다면 아무리 영업을 잘해도 ‘70, 80점 장사’다. 이미 IT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본사 입장에서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사다. 본사에서도 세계 시장으로 뻗어 나가는 삼성·LG·SK텔레콤 등 선두를 달리는 기업과 끈끈한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본사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설득력, 대기업과 긴밀한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국적 기업의 또 하나의 롤은 결국 대기업과 본사를 잇는 ‘메신저’라는 얘기다. 여기에 국내 중소기업의 세계 판로를 열어 줄 수 창구 역할까지 한다면 금상첨화다. 이를 테면, 국내에서 검증된 소프트웨어 제품을 재검증해 주문자 상표 부착(OEM)방식으로 키우는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다국적 기업 사이의 파트너 십니다.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경쟁 관계지만, 서로 협력할 부분이 많다. 한 다국적 기업 임원은 “가격 구조가 무너질 정도로 물,불 가리지 않는 영업 난투극이 계속되고 있다. 기회가 되면 건전한 영업 문화를 만들자고 경쟁사에 제안하고 싶다”고 했다. 동종업계 다른 다국적 기업 임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이들 업체끼리 대화 채널은 전무하다. 평가 절하된 다국적 IT기업의 위상 재정립도 결국 서로의 협력으로 풀어야 한다.
국내 시장에서 단순히 상품을 많이 파는 영업 맨으로 다국적 기업의 위상을 좌우하는 시대는 지났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