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업용 소프트웨어(SW) 업체인 SAP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SAP는 70년대 혁명적인 발상으로 SW업계에 데뷔했다. SW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당시에 재무회계와 인사·생산·판매 등 비즈니스를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 미국 기업 일색 컴퓨팅 시장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SAP는 개발초기부터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개발했다. 전사자원관리(ERP)가 그것이다.
SAP는 현재 ERP 시장 부동의 수위업체로 SW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미국 업체를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SAP는 이제 독일을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SW업체로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SAP의 성공비결은 ERP라는 한 우물을 팠다는 점’을 꼽는다. 선택과 집중의 승리라는 얘기다.
물론 독일 정부의 SW 육성 노력도 한몫을 했다. 백종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은 “독일이 세계적인 SW업체를 육성하기 위해 SAP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했다”며 “우리 정부도 이 점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SAP는 독일 내수 시장의 90%를 장악, 이를 기반으로 세계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2006년 2월 국내 SW업계 현주소는 영세성과 과당경쟁으로 압축된다. 티맥스소프트와 안철수연구소만이 매출 400억원을 겨우 넘겼으며, 핸디소프트와 한글과컴퓨터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 가능성을 엿보게 하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나머지 업체는 말할 것도 없다.
정부의 SW산업 육성 의지가 어느 나라보다 강한데도 SW산업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형태근 정보통신부 국장은 “국내에 등록한 SW업체 수가 7000여개로 시장규모가 우리의 10배인 일본과 엇비슷하다”며 “정부의 SW산업 육성정책이 힘을 받으려면 업계의 자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SW업체당 평균 매출액은 91만달러인 반면 일본은 1090만달러에 이른다. 정부가 아무리 많은 SW산업 지원 자금과 정책을 만들어도 현재의 상태로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설명이다.
국내 SW업체는 사실상 정부 보호 아래 목숨 줄을 이어왔다. ERP업계의 경우 정부의 중소기업 정보화 사업에 기대어 우후죽순 생겨났으나, 최근 정부의 지원 자금이 끊기면서 일부 업체를 제외하고는 업계 전체가 경영 위기에 내몰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업계 탓만 할 상황도 아니다. SW 품질 인증제도인 굿소프트웨어(GS) 제도를 만들어놓고도, 여전히 발주처는 GS 제품 사용에 머뭇거리고 있다. 조풍연 GS인증사협의회 회장은 “국내 SW업체는 내수를 기반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공공기관이 국산 SW 사용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며 “정부에서 품질을 인증한 GS 제품 구매에도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안방은 소수의 글로벌 SW업체가 장악하고, 국내 업체는 시장이 협소해져 과당 경쟁을 남발하는 상황이다. 특단의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SW강국을 외쳐도 희망은 없어 보인다.
업계 전문가들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하루빨리 ‘메이드 인 코리아’ 대표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박대연 티맥스소프트 최고기술경영자(CTO)는 “솔루션별로 대표기업을 지목해 정부가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며 “업계도 중복투자를 피하고 경쟁력 있는 분야를 찾아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SW업계는 미들웨어와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업무프로세스관리(BPM), X인터넷 등 분야가 어느 정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IT839와 관련된 임베디드SW 분야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고현진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원장은 “정부 차원에서 전략 SW 분야에 선도기업 위주로 집중적인 지원을 하고 선진기술을 상품화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주문하면서 “선도·중견 패키지SW 기업 육성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임SW 대표 기업
게임산업이 글로벌 무대로 확장되면서 한국에도 글로벌 대표주자들이 쑥쑥 커나가고 있다.
한국형 게임 소프트웨어의 세계화 첨병으로는 엔씨소프트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엔씨소프트는 기존 온라인게임 ‘리니지’, ‘리니지2’의 북미, 아시아, 유럽시장 수출에 그치지 않고 공격적인 현지 개발사 인수를 통해 해외시장에 최적화된 히트작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지난해 전세계에 판매를 시작한 패키지형태의 게임 ‘길드워’는 북미·유럽시장에서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에서의 국민게임은 해외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넥슨이 입증해보였다.
넥슨은 지난 2004년 중국시장에서 자사 온라인게임 ‘비엔비’로 동시접속자수 70만명을 기록하며 기네스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카트라이더’ 등 한국에서 히트한 게임들이 중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주요국가 게임시장을 휩쓸면서 넥슨은 아시아 게임제국을 구축했다.
온라인게임 뿐 아니라 비디오게임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이 뛰고 있다.
판타그램은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용 게임 ‘킹덤언더파이어’ 시리즈를 만들어 지금까지 해외시장에서 수십만장을 판매하는 성과를 올렸다. 판타그램은 오는 4월 일본에서부터 출시 예정인 X박스360용 게임 ‘나이티나인 나이츠’를 개발중이다.
소프트맥스도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용 게임 ‘마그나카르타:진홍의 성흔’을 만들어 일본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 게임업체가 가진 발군의 개발력에 대한 해외 메이저업체의 러브콜도 이어지고 있다. 세계최대 게임업체인 일렉트로닉아츠(EA)는 한국의 네오위즈와 손잡고, 전세계적으로 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메가히트 게임 ‘피파’를 온라인게임으로 만들어 올해 선보일 예정이다.
◆기고: 전문SW기업 육성과 세계화가 해법
-고현진 한국SW진흥원장
잭 웰치가 제너럴일렉트릭(GE)의 회장이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피터 드러커에게 달려가 GE를 살릴 수 있는 묘책을 물었다고 한다. 드러커는 그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일’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가르쳐 줬다. 잭 웰치는 20여년 동안 GE라는 거함을 경영하면서 분야별로 1, 2위가 아니면 과감하게 접고 선택과 집중을 강화해 GE를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만약 드러커에게 국내 SW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묘안을 묻는다면? 역시나 ‘가장 잘할 수 있는 일’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 아닐까. 즉 ‘전문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IT강국인 우리나라에서 MS나 IBM 같은 글로벌 SW기업이 왜 없느냐고 종종 묻는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그 나름의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기업마다 IT서비스 기업들을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고, 폐쇄적인 시장환경으로 인해 자기 그룹사 이외의 기업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힘든 실정이다. IT서비스란 IT의 기본지식 위에 사업영역의 전문적 경험이 결합된 것으로, 이것저것 다 하다가는 노하우가 축적될 리 만무하다. 따라서 대기업은 현재의 주력산업을 중심으로 국제 경쟁력을 가지는 IT서비스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기업별로 와이브로나 DMB 등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지 않은가. 각자 장점을 가진 특화 분야에 집중하고 전문성을 확보한 뒤 해외로 나가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만 하고 핵심역량이 아닌 것을 사주는 넓은 아량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SW 중소기업들도 전문화가 필수적이다. 아니 절박하다.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전사자원관리(ERP), 고객관계관리(CRM) 등 전문영역에서 성공하는 중소기업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전문분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 그동안 중소기업 정책은 되도록 많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하지만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들을 선별하고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수평적인 지원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적어도 매출 1000억원 규모의 기업 10개를 육성하고, 이들이 스스로 경쟁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중소 SW기업들도 가장 잘할 수 있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워야 1등만이 살아남는 글로벌 SW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익종기자@전자신문, i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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