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가 미래다]2부 기술트렌드(3)오감을 자극하라-표현기술

장면 하나. 다음 달 LPGA에 처녀 출전하는 소녀 골퍼 장지원씨(17). 그녀는 요즘 필드보다 실내 연습장에서 맹훈련중이다. LPGA 코스를 3D 입체 화면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시뮬레이터 앞에 서면 당장 LPGA 본선 무대에 오른 것 같은 긴장감이 몰려온다.

시뮬레이터는 3D 입체 화면 뿐 아니라, 바람소리, 새 소리, 갤러리의 웅성거림까지 빼놓지 않고 재현한다. 어린 장씨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식은 땀도 흐른다. 긴장한 장씨의 샷이 번번이 빗나가고, 장씨는 ‘사이버 LPGA’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경기가 끝난 뒤 시뮬레이터는 장씨의 심장박동, 피부변화 등 생리적 변화를 데이터로 저장해 보여주며,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월드컵을 3개월 앞둔 국가대표팀도 사정은 비슷하다. 팀 훈련이 끝나면 월드컵 본선 무대에 처음 서는 젊은 선수들이 시뮬레이터를 통해 담력 키우기 훈련에 한창이다.

 

장면 둘. LG전자 디자인연구소 책임연구원 김성수씨(41). 10년 넘게 휴대폰을 디자인해온 그는 신세대들이 가장 많이 쓰는 감성어에 항상 귀를 쫑긋 세운다.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는 물론 애인, 친구, 초콜릿 등 젊은이들의 관심사를 대변할 감성어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수백종의 휴대폰 디자인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디자인 자동 진화엔진 프로그램을 돌리면 제시된 디자인 시안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거쳐 실시간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불과 10년전만해도 신제품 디자인을 위해 1년전부터 프로젝트팀을 가동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인간 감성공학에 기반한 표현기술의 발달은 인간 삶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을 전망이다.

인간 감성과 신체 변화를 정교하게 파악해내는 시뮬레이터의 등장은 운동선수는 물론 의사, 비행기 조종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적은 비용으로 실제와 같은 훈련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또 정교한 디자인 자동진화 엔진 프로그램이 상용화되면 수백명이 투입되던 디자인 프로젝트를 단 한 사람이 감당하는 ‘생산성 혁명’도 가능해진다.

중앙대 윤경현 교수는 “인간의 오감을 접목한 콘텐츠는 콘텐츠 자체의 질적 향상은 물론 인간의 문화, 경제생활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오감을 자극하는 CT기술이 유비쿼터스와 같은 첨단 IT기술과 접목되면 일상의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심신이 지친 직장인이 귀가하면 이를 간파해 오디오가 한결 부드러운 음악을 틀어 준다든지, 러닝머신 앞에 서면 신체리듬을 파악해 그 날에 맞는 달리기 거리를 제시해주는 등 인간 삶이 보다 편리하고 윤택해진다.

산업 파급력도 적지 않다. 세계 최초 감성 기반 게임이나 영화, 생리적 지표를 응용한 홈 오토메이션 등 새로운 제품과 시장이 속속 탄생한다. 이 처럼 인간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감성형 CT기술은 생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연구개발 경쟁이 뜨거운 분야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 초보적인 기획이나 기술에 머물러 있을 뿐 구체적인 응용 프로그램이 나온 사례는 거의 없다. 복잡 미묘한 인간 감성을 정량화하고, 이를 응용하는 작업 자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감성형 문화콘텐츠(CT)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생리적 지표 측정 기술 △생리적 데이터 분석·조합 기술 △생리적 지표를 적용한 인터페이스 기술 △응용시스템 개발 기술 등 크게 4가지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 가운데 다양한 센서를 이용해 심장, 손가락 온도, 피부반응 등 다양한 생리적 지표를 정량화해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생리적 지표 측정 기술’의 경우 국가간 기술 격차가 거의 없는 보편적인 기술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과학기술부가 지난 97년 G7 선도 기반 기술과제 일환으로 인간 감성 데이터를 세계 두 번째로 모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생리적 지표를 판단 가능한 감성 유형으로 분류하거나 조합하는 ‘생리적 데이터 분석·조합 기술’에서는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5∼10년 가량 뒤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생리적 지표와 컴퓨터를 연동하는 인터페이싱 기술, 시뮬레이터와 같은 응용 시스템 개발 기술도 2∼3년 가까이 기술격차가 벌어져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 개발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유기적으로 통합해 연구할 수 있는 통합 학제적 연구가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인간 오감은 인지과학, 감성과학, 컴퓨터 공학, 디자인 등 어느 한 분야의 연구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턱없이 모자란 디자인 심리학 연구 인력도 디자인과 심리학 전문가들의 협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문제로 꼽히고 있다. 범 국가적으로 감성 기술의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성대 지상현 교수는 “일본에서는 감성 기술 개발에 범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앞선 인공지능 구현 기술과 자동화 기술의 결합에 대한 연구가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감성 기술에 대한 산·학·관 유기적인 협력이 이뤄지지 않으면 선진국과 기술격차를 좁히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 감성 기술 어떤 게 있나

해외에서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 개발 경쟁이 뜨겁다. 미국 카네기멜론대학 엔터테인먼트기술연구소(ETC)는 현재 ‘인식증폭(Augmented Cognition)’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뇌파를 통해 외부 기기를 조정하는 프로젝트로 사용자 기분을 분석해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레인TV’나 뇌파로 미니 자동차를 조정하는 연구가 진행중이다.

미디어 랩 유럽은 뇌파 데이터를 게임 제어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뇌파가 안정되면 안정될 수록 캐릭터 제어가 원활해져 게임을 즐기면 즐길 수록 마음이 평온해지는 게임을 개발하기도 했다.

디자인 분야에서도 연구는 활발하다. MIT 미디어 랩에서는 건축디자인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디자인 자동 진화엔진을 개발중이다. 일본 문화 패션디자인연구소는 디자인을 감성별로 DB화해 감성어를 입력하면 관련 디자인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다. 디자인 자동화 시스템과 관련해서는 미·일간 총성없는 전쟁이 뜨겁게 펼쳐지는 양상이다.

일본은 현재 감성과학회를 중심으로 대학간 협동 연구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츠쿠바 대학 예술공학과의 하라다 교수팀은 인간의 생리적 지표를 이용해 감성을 판단하고 이를 토대로 2004년 말부터 스마트 액자 개발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