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권력지도가 바뀐다]친디아 엔지니어가 판 친다

아웃소싱 업무로 기반을 닦은 인도인은 이제 핵심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고급 관리인으로도 승진하는 등 실리콘밸리에서 날로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사진은 인도인 네트워크인 TiE 실리콘밸리 지부가 지난해 개최한 콘퍼런스 ‘TiEcon 2005’
아웃소싱 업무로 기반을 닦은 인도인은 이제 핵심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고급 관리인으로도 승진하는 등 실리콘밸리에서 날로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사진은 인도인 네트워크인 TiE 실리콘밸리 지부가 지난해 개최한 콘퍼런스 ‘TiEcon 2005’

 지난 3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대기업 임원 A씨. 미국 법인으로 발령받은 그는 오자마자 두 번 놀랐다. 먼저 살 집을 알아보는데 15곳 중 단 2곳을 제외하고 주인이 대부분 중국인 아니면 인도인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 학군이 좋기로 소문난 쿠퍼티노는 더욱 심하다. “아이들 학교에 가니 미국보다 동남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고등학교까지 성적 좋은 학교일수록 아시아계 학생이 70∼80%에 달하고 있다. 현지 사정에 맞춘 나라별 과외 학습지가 판을 칠 정도.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이후, 20만명이 한꺼번에 해고당하는 구조조정에 시달렸던 실리콘밸리. 다시 기지개를 켠 실리콘밸리의 주도권은 이제 아시아계로 넘어가고 있다. 지금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중심 세력은 중국과 인도인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백인(40%)과 히스패닉(23%)이 아직 많지만 33%의 아시아계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엔지니어 80%가 아시아계=실리콘밸리에 매년 해외에서 유입되는 인구 규모는 캘리포니아주 전체 평균치보다 60% 정도 많다. 미국 전 지역 평균치보다 무려 350%나 높다.

 이들 중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에서 몰려온다. 한 조사업체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IT업체 엔지니어의 80%가 아시아계다. SW는 인도계가 60%가 넘고 HW는 중국계가 50%를 차지한다. 한국 엔지니어는 아직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한국의 앞선 IT를 활용해 시장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SK텔레콤 미국 법인장 천태기 상무는 한국에서 검증한 모바일 서비스의 미국 출시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IT 주도권을 잡기 위해 민족 간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인도와 중국의 절대 다수에서 나오는 힘은 부인할 수 없어도 한국에서 검증된 제품의 성공 가능성은 높다”고 말했다.

 중국인 못지 않은 수완을 자랑하는 인도인의 민족성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23년동안 새너제이에 거주했다는 50대 재미교포는 인도인에게 집을 팔았다가 “남는 게 없었다”며 인도인 특유의 노련한 흥정에 혀를 내둘렀다.

 이종훈 아이파크 소장도 인도인의 기업가 기질을 중국인보다 높게 쳤다. 그는 “아웃소싱으로 실력을 키워 온 인도 인력이 닷컴 버블 때 대거 유입됐다”며 “버블은 꺼졌어도 인도인은 수학과 영어 실력, 타고난 상술까지 겸비해 실리콘밸리 실력자로 부상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 일본인을 만나기는 매우 힘들었다. ‘재팬 타운’만이 일본의 긴 이민 역사와 80년대 실리콘밸리를 긴장시켰던 일본 반도체 역습을 짐작케 한다.

 현지인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거주 일본인들은 1세대보다는 2, 3세대가, 엔지니어보다는 마케터, 벤처기업보다는 도요타 등 일본 기업 법인에 근무하는 사람이 많다.

 ◇밸리 인력, 자국 첨단 기술력의 원천=흥미로운 것은 실리콘밸리의 인도와 중국 엔지니어가 자국 경제를 뒷받침하는 ‘인재 샘물’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

 먼저 최상의 엔지니어 코스로 단련된 중국·인도인의 고국행이 부쩍 늘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18개월동안 3만명의 인도계 기술 인력이 인도로 돌아갔다며 두뇌 유출을 우려하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중국계 전자그룹 화훼이·ZTE 등은 많게는 연간 1500여명씩 이곳 인력을 흡수한다.

 홍콩 출신으로 소프트웨어업체 사이베이스 CEO까지 오른 존 첸 사장은 “30여년 전, 미국 유학을 끝낸 후 홍콩으로 돌아갔을 때는 전자공학자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며 “요즘은 중국에서도 IT 일감이 많으니 실리콘밸리 인력의 선택 폭도 넓어졌다”고 밝혔다.

 탄탄한 인맥도 자국 경제와 실리콘밸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인도계 TiE, 중국계 AAMA 네트워크는 본국 IT기업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버팀목이다. 우리도 2001년 IT네트워크(KIN)를 결성해 자금 유치와 한인 인적 교류에 힘쓰지만, 시작 자체가 10∼20년 늦었다.

 김민수 KIN 국장은 “국내도 우수한 해외 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부와 산업계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며 “실리콘밸리는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우수 인력과 첨단 기술의 채널”이라고 말했다.

 새너제이(미국)=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