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1)](https://img.etnews.com/photonews/0603/060313015839b.jpg)
60년대 초반은 미국을 중심으로 컴퓨터를 기반으로 2차 산업 혁명이 태동하던 정보혁명의 시대였다. 미국과 선진국들은 신세계 건설을 위한 기치를 올리고 있었지만 우리 나라는 소위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조차 컴퓨터와 탁상용 계산기를 구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정보화에 관한 한 미개척지로 남아있었다.
이에 나는 우리땅에 정보혁명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결의로 황무지인 컴퓨터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이러한 나의 지난 40년 세월에는 크고 작은 결단의 순간들이 많았다. 아쉬움도 많았고 아찔할 만큼 판단을 잘했다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잘한 판단이건 못한 판단이건 그 것은 한국 컴퓨터 역사와 동반을 위한 길이었다.
나는 21세에 서울대 사회학과 2학년을 수료한 후 풍운의 꿈을 품고 미국 아칸사스 주립대학의 유학 길에 올랐다. 접시닦이 등의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학 생활을 보내던 중 아버님의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란 말씀으로 미국의 촌구석인 아칸사스에서 미시간 대학으로 편입했다. 나는 문화·음식·언어 등의 장벽을 극복하랴 아르바이트 하랴 정신 없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과 비교해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당시 주임교수인 애클리 교수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졸업생의 95% 학생이 다 취업이 되는데, 상위 20%에 들어가는 저는 왜 취업이 안 되는 겁니까? 이건 교수님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까? 이 나라에 인종 차별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까?” 그러자 애클리 교수는 다음날 다시 찾아오라고 했고 SSRC란 사회조사연구센터를 소개시켜 주었다. SSRC의 컴퓨터실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인프라를 갖췄고 이곳에서 나는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나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경력에 좋은 몇 몇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이 경험들은 취업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한편 경제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주임교수와의 면담에서 교수는 내가 학계에 있기보다는 비즈니스 분야에 더 적합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조언해 줬다. 여러 날 고민 끝에 나는 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취업을 위해 뉴욕으로 날아가 여러 업체들과의 인터뷰 끝에 어떤 한 은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은행에서는 내가 6년 동안 공부한 경제학 지식 보다는 기껏 1학기 동안 공부한 컴퓨터 지식을 더 높이 샀다. 하지만 경제학 분야를 하지 않을 바에야 굳이 그 은행에서 일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실제로 나의 경제학 지식을 누군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의미가 없다. 나를 인정해주는 분야, 컴퓨터 관련 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때 내 눈에 들어온 곳이 IBM이었다. 이왕 컴퓨터 일을 하기로 했으면 IBM 같은 곳에 입사해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면서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판단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2년만 IBM에서 근무하기로 결심하고 1960년 6월에 IBM에 입사했다. 물론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컴퓨터 분야를 떠나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하지만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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