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 2004년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어떤 영화가 차지했을까. ‘스파이더맨2’,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알렉산더’, ‘킹 아더’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대작이 즐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흥행 챔피언은 못생긴 초록괴물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슈렉2’였다.
제작비 7000만달러(약 682억원)를 들인 3D 디지털 애니메이션 ‘슈렉2’는 북미에서만 4억4100만달러(약 4299억원)를 벌었고 전 세계적으로는 무려 9억2000만달러(약 8970억 원)를 긁어모았다. 이 수치는 DVD 등 부가판권 시장까지 합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처럼 문화기술(CT)은 애니메이션 산업이 실사 영화 산업을 넘어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하청업체에 머물렀던 우리나라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도 바로 이같은 가능성 때문이다.
◇3D 애니메이션 전성시대=1995년 장난감들의 갈등과 우정을 그린 ‘토이스토리’는 최초의 극장용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된다. 픽사가 제작하고 디즈니가 배급을 맡은 이 애니메이션은 전세계적으로 3억58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3D 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후 ‘벅스라이프’, ‘니모를 찾아서’, ‘슈렉’, ‘아이스에이지’, ‘인크레더블’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애니메이션들은 많은 수익을 올렸지만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은 짧은 시간에 저렴하게 제작해야하는 TV 시리즈물을 제외하고는 퇴조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거의 유일하게 셀애니메이션을 제작하던 디즈니조차 미국·프랑스·캐나다의 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잠정 폐쇄한 상태다.
◇기회의 땅=이처럼 전세계적으로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3D 애니메이션 분야는 우리에게도 기회의 땅이다. 밉컴이나 밉TV 등 전세계 방송프로그램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고품질 3D 애니메이션을 잇달아 선보이면서부터다. 아이코닉스엔터테인먼트·오콘·하나로텔레콤·EBS 등이 공동 제작한 3D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뽀롱뽀롱 뽀로로’는 이미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에서 인기몰이중이다. 오콘의 ‘선물공룡 디보’는 국내외 투자를 일찍이 마무리 짓고 올 해 말 전세계 방영을 앞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시은디자인의 ‘메리 크리스마스 떼떼’가 라이선싱그룹에서 50억원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올해와 내년을 기점으로 국산 3D 애니메이션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운 수출효자 상품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야기가 받쳐줘야=2001년 14억달러(약 2조원)를 들여 만든 초실감 애니메이션 ‘파이널 판타지 무비’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실제 사람과 같은 디지털배우들이 등장해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 ‘파이널 판타지 무비’는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파이널 판타지 무비’가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나리오가 진부했다. 관객이 작품에 빠져들지 못하고 기술에만 집중했다. 이후 3D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를 흉내 내기보다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모습이다. 물론 ‘파이널 판타지 무비’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킹콩’의 절벽 추락 신에서 등장한 디지털 배우의 전신이 되는 등 관련 산업에 많은 발전을 불러온 좋은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3D 애니메이션이 갈 방향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는 기술(Technology)의 발전이 중요해도 결국 이 기술은 결과물인 콘텐츠(Content)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개발돼야한다는 CT 발전의 기본 전략과도 일치한다.
◇양방향·체험형으로도 진화=디지털 기술은 단지 애니메이션의 모양새를 좋게 만들어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는 앞으로의 유비쿼터스 시대에는 애니메이션 재생 매체가 전통적인 영화와 TV만이 아닌 휴대폰, PDA, 휴대형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 등 다양해진다. 이처럼 네트워크로 연결된 애니메이션 재생 매체가 대중화하면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애니메이션 시청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상에서 애니메이션과 상호 작용하는 애니메이션이 출현한다. 이같은 대화형 애니메이션이 가능해지려면 실시간 애니메이션과 렌더링 기술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유비쿼터스 환경에 맞는 최적의 네트워크 인프라가 있기 때문에 이런 우위를 활용한다면 양방향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선도 기업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화관광부도 지난해 수립한 애니메이션 분야 CT 로드맵에서 감성애니메이션 표현기술과 인터렉티브 반응기술 등 관련 기술을 주요 과제로 선정했다.
◆공정관리도 CT의 핵심
지난해 7월. 역삼동 문화콘텐츠센터(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애니메이션 업계 종사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열기로 가득했다. 3D 애니메이션 전문업체 인디펜던스가 개발한 애니메이션 제작공정 솔루션 ‘나즈카 라이너(Nazca Liner)’의 첫 시연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나즈카 라이너’는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제작공정을 한눈에 파악하고 관리해주는 솔루션이다. 이날 첫 선을 보이는 자리였음에도 당장 ‘나즈카 라이너’를 활용하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쳤다. 주최측 조차도 놀란 이 열기는 그동안 애니메이션 제작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인디펜던스는 ‘원더풀데이즈’ 제작 당시 공정관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2D와 3D를 섞는 독특한 기법 때문에 한 팀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다른 팀은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1년 반이던 예상 제작 기간은 3년으로 늘어났고 제작비도 70억원에서 100억원이 됐다. 이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전반적인 어려움이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나즈카 라이너’를 대표적인 문화기술(CT) 개발 과제로 추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은 올해 상용화하는 이 프로그램이 업계에 보급되면 애니메이션당 약 18% 이상 제작비가 줄어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연간 약 352억원 규모다.
이처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CT는 단지 콘텐츠 자체를 멋지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넘어서 산업 자체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이는 할리우드처럼 거대 자본을 투입하기 힘든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요소다. 이미 우리나라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업체보다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나즈카 라이너’와 같은 공정관리 기술이 가미되면 성과는 상상을 초월할 전망이다.
박영민 인디펜던스 본부장은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기술과 창작 사이에 의사소통 통로가 없어 기술이 사장되는 경우도 많다”며 “CT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자들이 문화 산업을 잘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