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6)

[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6)

(6)운명적인 한국 체류

 H사 거래 건이 무산된 후 일종의 경제연구소 같은 한국종합기술공사(KEC)로부터 컴퓨터를 도입, 과학기술용으로 활용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것은 훗날 KAIST의 원형이라고 할만한 구상이었다. 이때 나는 S박사와 같이 일했다. 후에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내부 사정으로 유야무야 되었지만 나와 S박사가 만든 이 계획서는 1971년에 KEC가 KIST로 전환할 때 국내 컴퓨터 활용의 밑그림에 일조를 했다.

 KEC 프로젝트 건 취소로 나는 백수 모드에 돌입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 보니 ‘실업자 신세’란 자괴감이 뼈에 사무쳤다. 결국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고 친분 있는 분들께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던 중 생산성본부의 이은복 이사장을 찾아갔다. 당시 이은복 이사장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일본 생산성본부 이사장 소개로 후지쯔 화콤(FACOM) 222 기종을 도입키로 덜컥 계약했는데 정작 기계를 활용해야 할 생산성본부측은 컴맹(?)이었던 것이다. 이은복 이사장은 나에게 한 일년만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IBM에 간다고 연락을 해놓은 상태여서 출발 전 사흘 동안만 향후 실행 방안을 잡고 기본적인 교육을 도와주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밤을 새워 계획서를 만들고 컴퓨터의 도입과 관련된 인사 및 훈련, 자금 관리 등 계획을 짜고 도표도 집어넣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연구 결과물이었다.

 다음날 세 명의 전문인력에게 계획을 설명하는 데 2명은 핑계를 대며 교육도중에 빠지고 나머지 한명에게는 피교육생이 당연히 보여야 할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강의는 더 정성껏 준비했지만 한 사람만 출석했다. 여기서 내 성격의 특징이자 단점의 하나인 ‘퓨즈가 짧다’가 발동했다. 난 이사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선언했다. “좋습니다. 제가 1년 동안 한국에 남아 이 일을 궤도에 올려놓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IT의 초석을 닦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던 두 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그분들이 내 강의를 착실히 들었다면 나는 맘 편히 미국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생산성본부 근무는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낙하산(?) 임원이라며 나를 냉대했다. 내 책상을 구석에 몰아넣는가 하면 문방구류도 직접 사야 했고 겨울철 난방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컴퓨터 도입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새로 들여오는 화콤222의 교육 및 인력수급 문제 해결에 주력해야 했기때문이다. 이 와중에도 H본사와 협상, 교육·소모품 무상 지원·렌털 비용 등의 계약조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는 1967년 화콤 시스템을 맞이하게 됐다. 전체 무게가 35톤인 탓에 대형 트럭 10대가 동원 되고 경호차량 2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시가행진을 하고 필동 2가의 교통을 모두 차단한채 본부에 도착했다. 이때가 사실 국내 IT 산업의 원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화콤이 들어오고 얼마 후 경제기획원 통계국이 IBM 1401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한국생산성본부가 지난 67년 대형 트럭 10대를 동원 35 톤 무게의 후지쯔 화콤(FACOM) 222를 국내 들여올 당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