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7)

[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7)

 그 무렵 나는 모 시멘트회사 설립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친척 형인 K콘크리트 김상수 사장이 아버님께 말씀을 드려 시멘트 공장을 설립하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유명한 무기 거래상이던 아이젠버그나 다국적 화학업체 몬산토 측과 접촉, 필요한 외자 도입 협조를 받아냈다. 이후 시멘트 공장 설립은 급물살을 탔다. 평소 컴퓨터 분야에서 일하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버님은 기회다 싶어 나에게 시멘트 사업에 전력투구하라고 자주 언급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님, 시멘트 공장이야 저 말고도 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컴퓨터 분야는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설혹 시멘트 공장에서 시멘트가 아닌 황금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나는 컴퓨터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하곤 했다.

 아내와 주변 사람들도 “왜 전자계산소 일처럼 어려운 일을 자청, 고생을 하냐”며 다그쳤지만 ‘컴퓨터의 도입과 확산’에 미쳐 있는 난 아랑곳 하지 않았다. 특히 컴퓨터와 인간의 접속, 그 상호작용으로 세상이 변화하는 기적 같은 일에 주역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은 내 젊은 피를 끓게 했다. 이 분야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경우에도 충성심을 강조했다. 단물을 좇아 이 분야에 들어와 다시 단물을 좇아 타 분야로 떠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이 너무도 허무할 것이라고.

 한편 전자계산소 업무를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선 생산성본부란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필요한 인력 채용에 제동이 걸리는 등 독자적인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화콤 시스템을 설치한 지 얼마 후 1967년 5월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가 한국생산성본부에서 독립했고 이것이 현재 KCC 정보통신의 전신이었다. 이 후 새 식구들도 뽑고 교육도 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수행의 준비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들여 온 후 맨 처음 따낸 일감이 한국은행 외환관리 업무였다. 지금처럼 데이터 분석 형태가 아니고, 기존 수작업을 그대로 기계로 옮기는 단순 업무였다. 인건비와 직접비만을 최소로 책정한 비용에 계약을 했지만 그래도 일단 컴퓨터를 받아들여 업무에 활용한다는 그 자체에 우리는 감격했다. 시스템이 놀지 않고 돌아가는 것 자체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때 한국은행 간부들의 용단 자체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행 프로젝트 이후 사방 팔방으로 영업 활동을 벌였다. 이에 한일은행의 환 대사 업무, 대한중석 전체 업무 전산화 프로젝트, 석유공사 프로젝트 등을 수주했다. 환 대사 프로젝트 수행 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것은 프로그램을 개발한 후 묘하게도 에러가 발생, 사람들 사이에 컴퓨터 무용론이 나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 대사 업무 담당 직원이 실직을 걱정, 일부러 데이터를 감췄던 것이다. 나는 직원들이 전산화 반대편에 서게 됨을 우려, 그들의 직업을 보장한다는 회사의 약속을 받았다. 이처럼 초기에는 지금으로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반발들이 많았다. 그런 반발은 미처 예상하기 어려운 곳에서 터져 나오곤 했다. 나로서는 그런 예상치 못한 반발을 처리하고 무마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cylee@kc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