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로망스

‘로망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신파적 구도에 주인공들의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최대한 살린 멜로 영화다. 영화 속 형준(조재현 분)은 정의를 위해선 상관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돌진하는 강력반 형사다.

그 때문에 간부들의 눈밖에 나 지방으로 전출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직선적 성격은 여전하다.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보고 싶은 자식도 제대로 만날 수가 없다. 강직한 형사지만 아이에게 줄 인형을 사 놓고 남 몰래 흐느끼는 따뜻함도 가지고 있다. 반면 윤희(김지수 분)는 거대권력을 가진 재력가 집안의 여자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어느날 경찰서 앞에서 아내 윤희에게 손찌검을 하다가 그것을 목격한 경찰에 의해 부부는 경찰서로 연행되지만 윤희의 남편은 전화 한 통화로 가볍게 풀려난다.

형준과 윤희는 그렇게 만나지만, 사실 그들의 인연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을 영화는 도입부에서 보여준다. 불필요한 친절이다. 신분의 차이와 도덕적 장벽을 뛰어넘는 그들의 극단적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형준과 윤희의 관계에 그렇게 디딤돌까지 멀리 놓을 필요는 없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 설정에 감독이 부담감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각자 상처를 지닌 남녀가 가까워지는 것은, 서로의 은밀한 상처를 이해하며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확인이 들 때이다. 윤희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지만 윤희의 남편 정환(엄효섭 분)은 아내와의 불안한 동거를 조율하며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해 나간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경찰 검찰 등 권력의 상부구조와 긴밀한 협력을 맺으며 윤희의 외도를 정리하려고 한다. 윤희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고 형준을 비리경찰로 몰아 죽게 만들지만, 극적으로 형준은 살아나고 윤희가 갇혀 있는 정신병원을 찾아간다. 경찰 수뇌부에 두 사람을 사살해 달라고 부탁하는 정환. 형준의 동료들인 강력반 박형사(장현성 분) 황반장(기주봉 분) 등은 형준을 구하기 위해 경찰과 대치 중인 정신병원으로 달려간다.

이 작품은 감정 과잉의 영화다. 조재현과 김지수라는 감성적 배우들의 내공도 만만치 않고 기본기가 튼튼한 연출력도 좋지만, 상업적 흥행에 대한 감독의 부담은 일상적 현실에 안착시키기보다는 영화를 비현실적 팬터지로 전이시켜버린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흥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결과 문승욱 감독이 자신의 진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김지수의 탱고씬이다. 언제나 무표정하게 깊은 그늘을 갖고 있지만 윤희는 탱고를 출 때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탱고는 현실의 억압과 상처를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목격한 탱고 연습실, 윤희는 결혼 전 탱고를 배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형준이 보는 앞에서 탱고를 춘다.

형준은 윤희가 그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그녀를 위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아르헨티나 이민을 결심한다. 그곳에 가면, 학원 같은 데서 탱고를 추지 않아도 되고 길거리에서 탱고를 춰도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고 윤희에게 말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처음부터 ‘로망스’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종결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윤희의 비극적 얼굴은 그녀에게서 희망의 싹이 돋아날 수도 있으리라는 극적 반전을 처음부터 차단시킨다. 감독은 스스로 퇴로를 닫고 관객들을 허구의 서사구조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사건이 종결된 후 관객들이 의자에서 일어나기 전, 감독은 엔드 크레딧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들의 옥상 탱고씬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들이 행복하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추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모든 가정법은 존재할 수가 없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법이 주는 삶의 성찰은 유효하다.

<영화 평론가 - 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