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8)

[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8)

(8)수출 활로 연 키펀치 용역

 1967년 5월 독립한 (재)한국전자계산소(KCC)가 홀로서기에는 돈·시간·사람 등 모든 요소가 절대 부족했다. 당장 인건비부터 확보하기 위해 생산성본부의 강의실에서 EDPS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이 공무원 교육 프로그램은 향후 우리나라 컴퓨터 대중화와 정부 전산화에 크게 기여했다.

 KCC는 제 2 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도 기여했다. 당시 계획 수립시 방대한 데이터의 시계열 분석이란 작업이 필요했는 데 나는 이 작업을 요청받고 여러 날 여관방에서 밤새우며 작업을 마쳤다. 당시 사람 손으로 작업을 했다면 수천 시간이 소요되고 작업의 정확성도 신뢰하기 어렵다. 이 일이 끝난후 미국 대사관의 경제 담당 책임자가 “작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생각 끝에 직접 돈을 받기 보다 당시 구상 중이던 ‘EDPS 국제 세미나’를 후원해달라고 요청했다. KCC는 유엔개발계획(UNDP)·국제노동기구(ILO)·과학기술처 등과 공동으로 조선호텔에서 3박 4일 동안 세미나를 개최, 성공리에 마쳤다.

 이 때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청와대 경제수석인 K씨가 불쑥 찾아왔다. K 경제수석과 대화 중 나는 약 30분 동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SW)의 차이 등을 설명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SW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우수한 두뇌를 잘 활용하면 SW를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키펀치 작업은 섬세한 여성에게 적합, 대규모 용역 수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청와대에서 수출 확대 비상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연초 수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정부 부처마다 비상이 걸렸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을 확대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상품이 나와야 하오. 다들 좋은 의견을 제시해보시오”라며 관계자들을 압박했다.  이때 K 경제수석이 전날 나에게 들은 얘기를 떠올리며 대통령에게 EDPS를 활용하면 고부가가치 수출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박 대통령은 그 준비 작업의 진척도를 물었고 이에 K씨는 얼떨결에 “현재 사람을 미국 현지에 보내 수출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건은 상당히 조명을 받았고 회의가 끝난 후 K 경제수석은 나에게 달려와 이 일을 착수해 줄 것을 간청했다. 나는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미국 CDC(컨트롤데이타)의 극동담당 부사장 및 본사 부사장을 한국에 초청, 과기처·재무부·체신부 장관들을 만나 협의한 끝에 키펀치 용역 수출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키펀치 용역으로 맡은 일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국 법령집과 온갖 재판 기록을 정리한 자료였다. 이밖에 미국 전화번호부, 일본 특허 및 세계 특허, 일본 학사 행정 기록 등도 있었다. 키펀치 용역 수출은 이후 4∼5년 동안 KCC에 엄청난 캐시카우 역할을 해주었다. 당시 교육사업은 천수답과 마찬가지로 기복이 심해 장기적으로 재정에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 때 K 경제수석에게 무심코 설명했던 나의 평소 소신이 KCC에 엄청난 혜택을 안겨준 것이다.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성실히 살다 보면 이렇듯 기회가 있을 때 잡을 수 있는 행운이 온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cylee@kc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