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미래학’은 생소하다. 네그로폰테, 존 나이스빗, 앨빈 토플러 등 외국 석학의 말 한마디에는 귀는 기울이지만 이들이 ‘미래학자’라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한국에서 기존 이론으로 해석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제대로 분석하고 예측하는 이론가는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년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주도로 만든 ‘IT기반 21세기 한국 메가트랜드 연구’는 한국적 미래학의 토대를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T가 사회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밝혀 내려는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57)와 강홍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디지털미래연구실 실장(48)은 우리나라 메가트랜드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한국 미래학의 선구자다.
“미래학 붐은 개인화에서 나왔습니다.” 김문조 교수는 미래연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개인의 불안감에서 나왔다고 진단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개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미래 연구는 사회 변화에 개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하는 의문에서 나왔습니다. 국가 지도자, CEO, 단체장, 개인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잘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정제된 진단과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강홍렬 실장도 미래연구의 본질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미래학은 관점의 학문’이라는 것. 그는 미래학의 성격을 ‘예술’에 가까운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미래연구는 상상력과 이성, 감성이 통합된 학문입니다. 미술이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는 않습니다. 객관적 정당성이나 효용성보다 정서적인 부분과 컨센서스에 호소합니다. 때문에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미래에 대한 상이한 시각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과정 자체가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 교수와 강 실장에게 미래 연구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어봤다. 윤종용 부회장의 지시로 삼성전자가 미래연구에 대해 착수한 데 이어 KT도 미래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올 하반기에 가동을 예고하는 등 기업에서도 본격적으로 뛰어들 태세를 보이고 있다.
“미래연구는 이미 산업이 됐습니다. 기업과 국가 모두 정제된 미래연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국은 이 점에서 다른 국가보다 한 발 앞서 있긴 하지만 아직 문제의식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봅니다. 미래연구의 방법론 경쟁의 시기가 올 때도 됐습니다. 이 지점에서 기업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문조 교수)
“기업과 국가가 하는 미래연구의 관점은 다릅니다. 기업은 현실을 분석하고 트렌드 파악은 국가 연구소에서 서비스해야 합니다. 기업 내부에서 미래 사회의 변화와 이에 맞는 연구개발을 하고 내부에서 컨센서스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강홍렬 실장)
김 교수와 강 실장 모두 한국적 미래학을 세우는 것의 걸림돌로 ‘학제간 연구 부족’을 꼽았다. 미래학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국내에서 학제간 교류는 미진하기만 하다.
“미래연구 자체가 독자적 학문영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학제간 연구를 통해 시스템화하고 전략적 마인드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 보유한 기술은 SF 영화에서 상상하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술 결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죠. 기술을 갖고 사람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강 실장)
“고등학교 때 임의적으로 나눴던 문과, 이과 구분을 대학 졸업까지 경계를 넘지 못하는 나라는 한국 등 동아시아 몇 개 나라 외에는 없습니다. 미래학은 단일 학문적 시각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통합학문 체제로 발전시켜야 보다 체계적인 미래학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김 교수)
그럼에도 빠르게 변하는 한국의 IT 인프라와 이에 ‘잘’ 적응하는 한국인은 미래연구의 소중한 토대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강 실장은 ‘IT는 사회 변화의 동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2000년 이후 중요한 사회변동의 원인이 IT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 “한국은 미래연구에서도 외국 선진국에 비해서도 2년 정도 앞서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 관심이 필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도 “한국은 IT로 인해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많습니다. IT가 선도하는 사회변동은 외국의 석학도 분석을 못합니다. 여기에 국내 연구진의 역할이 있습니다. 외국 석학들이 한국의 PC방에 대해 연구하는 논문을 본적이 있습니다. PC방에서 게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라면도 먹는다는 것이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와 강 실장은 한국의 미래연구는 지금 ‘방법론’에 대해 연구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방법론 연구는 모든 학문의 기본이자 시작이다. 지난 3년간의 한국사회 메가트렌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적 토대의 미래학이 만들어 지고 있다. 한국 미래학의 거장을 볼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은 단지 소망만은 아닌 듯 하다.
손재권기자@전자신문, gjack@
◆김문조 교수는
김문조 교수는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았다. 미국 조지아대학교대학원사회학 박사를 수료한 후 지난 82년부터 고려대 문과대 사회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난 2003년부터 ‘IT와 한국의 미래비전(21세기 한국 메가트랜드)’ 연구를 통해 한국 사회의 메가트랜드를 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강홍렬 실장은
강홍렬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디지털미래연구실장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92년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정보사회 정책연구실 책임연구원으로 몸담은 이래 줄곧 KISDI에서 연구를 해 왔다. 21세기 한국 메가트랜드 연구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