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12.끝)

지난 2001년 4월 KCC정보통신 창립 30주년을 기념한 금강산 단체연수 기념 장면.
지난 2001년 4월 KCC정보통신 창립 30주년을 기념한 금강산 단체연수 기념 장면.

(12.끝)일선을 떠나며

 KCC의 프라임 시스템 매출은 꾸준히 증가해 80년대에 연 2000만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사업 외형이 커지다 보니 향후 사업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고민 끝에 사업을 더 키우지 않고 수익을 주주와 직원에게 돌리기로 결심했다. 아이오와 대학 설계 패키지 도입 무산건과 함께 사촌 동생인 동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의사로 개업한 동걸은 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 어느덧 40대 후반이 된 나는 그동안의 삶과 사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만약 아이오와건이 성사되었다면 아마 사업 규모를 확대하는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인생을 보다 값지게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KCC 연간 수익의 절반을 주주와 직원들에게 돌렸는데 첫해인 84년 배당 금액은 7억원에 달했다(당시 KCC 연간 급여 총액이 4억원에 채 못 미쳤다). 그 이후에도 몇 년간 계속 증가했다.

 KCC 임직원은 업무 기여도에 따라 배당을 받았고 3000만원을 넘게 받는 직원도 있었다. 당시 3000만원이면 20평형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법이다. 또한 돈이 있는 곳에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당시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과 더불어 배당 비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87년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내가 그토록 애정을 가졌던 KCC였지만 물러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87년 강원윤씨가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렇지만 나는 후선에서 프라임을 이을 차세대 성장동력을 고민해야 하는 등 많은 숙제를 안고 있었다. 이후 나는 스트라투스 사업이나 프라임 중국 사업 인수건 등의 전략적인 부분만 관여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차기 경영 후계자로 생각했을 정도로 무척 아꼈던 성기철씨가 KCC 자회사인 선진시스템 사장 자리를 박차고 상당수 인원을 데리고 나가 독립했다. 성기철 사장은 탁월한 SW엔지니어로 강원윤씨와 더불어 KCC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이 일로 나는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나는 원래 엄청난 골초여서 하루에 3갑씩 30여년간 담배를 피웠는데 굳은 결심을 하고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담배를 끊었다.

 나는 원래 첫째 아들인 이상현 사장을 후계자로 키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성기철 사장 독립 이후 강원윤 사장마저 간경화로 건강이 악화돼 더는 회사 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상현이는 내 도움의 손길도 마다하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상현이는 91년 영국 유학을 다녀온 후 KCC에 합류, 실무부터 시작해 95년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상현 사장은 그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프라임 컴퓨터의 단종 이후 IMF라는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경영자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전임 사장으로서 후임 사장에게 좀 더 탄탄한 회사를 넘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한가지, 지금의 KCC가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진실한 애정과 열정이 있었으며 나 또한 다른 허튼 생각 없이 오직 한국 IT산업의 발전만을 위한 길을 걸어왔노라고 떳떳이 얘기해줄 수 있음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cylee@kc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