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상희 전 과기처 장관(3)

1989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한 과학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필자(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1989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한 과학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필자(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3)기초과학연구진흥법 제정(상)

 1988년 12월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되고 난 후, 첫 번째 결단은 1989년을 기초연구진흥의 원년으로 선포한 일이었다. 이것은 당시 국내외 환경 변화에 발맞추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가 70년대처럼 한강의 기적이라 칭송받는 고도성장을 다시 한번 이룰 엔진은 기초연구능력 배양뿐이라는 점이 명백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초연구능력은 너무 취약했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장래가 위기에 몰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절박하고 절실한 심정이었다.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상세설계·가공·조립·제작과정 등 생산기술과 주변기술은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으나, 기본설계·소재·시스템·소프트웨어 등 핵심기술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낙후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국제적 상황을 봤을 때, 미국조차도 사회 각계에서 국가경쟁력 약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미국은 1988년 4월 지적소유권 등 기술보호에 주력한 ‘종합무역법’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지금까지와 같은 값싼 기술도입방식으로는 새로운 하이테크 산업을 일으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특히 한국은 지속적 경제발전의 필수조건인 수출증대를 위해, ‘물질특허제도’라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받아들이는 등 연구개발(R&D)의 제도를 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9년을 기초연구진흥의 원년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일부 대학과 산업계의 협조를 받아 ‘기초연구 활성화 기본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고급 연구두뇌의 양성·공급체계를 구축하고, 원천기술개발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도록 대학 연구 활동을 적극 육성·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당시 대학의 기초연구비 규모는 너무나 작아서 대학교수 1인당 1년 동안의 연구비는 500만∼700만원 수준이었다. 연구시설도 형편없어 전자현미경을 갖춘 대학연구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고등학교 정도의 시설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밤 10시만 되면 대학 행정당국에서 연구실을 모두 소등하는 등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본격적인 대학의 기초연구활동과 고급연구인력 양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를 설득하여 공동으로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의 제정을 추진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기초연구만이 중요하냐는 둥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와 대부분의 산업계는 물론이고 일부 대학당국조차도 기초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초기 단계에 있었고, 타 부처와의 협조 없이 과학기술처 단독으로 이 계획을 진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밖에도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성과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어서 법 제정에 대한 현실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웠다.

  국제적 환경변화에 대응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대중적 호응을 얻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중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신념적 투쟁이었다.

rheeshph@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