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기초과학연구진흥법 제정(하)
사실 그동안 기초과학지원육성을 위한 법 제정의 필요성이 정부와 학계에서 여러 번 제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간의 시행착오를 분석해 입법을 위한 전략을 마련했다.
첫째, 법 명칭을 ‘기초과학육성법’에서 ‘기초과학연구진흥법’으로 바꿔 지원 대상을 모든 대학의 기초연구분야로 확대했다. 자연대 교수는 물론이고 공대·농대·의대 및 경상대 등 모든 대학 교수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둘째, 대학의 기초연구지원을 보편성과 평등성 원칙이 아니라 특성화와 탁월성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에 의한 연구예산의 효율적 운용이 가능하도록 틀을 마련했다. 법 제정에 대한 기본 전략을 수립한 후에는 그 추진과정에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대학, 국립대학과 사립대학, 자연대학과 공과대학 등의 갈등 구조는 한국 정치의 축소판과 비슷했다. 필자는 전국 주요 대학을 방문해서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 선진국 대학의 개혁 방향을 설명하고 국가경쟁력의 기본은 결국 대학의 기초연구경쟁력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대학은 연구보다는 부족한 교수와 교육시설에 대한 지원을 우선적으로 요청했다.
또 대학교육과 연구지원에 있어서도, 경쟁 원칙을 적용하면 연구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공무원이 대학의 교육·연구를 함께 망친다는 항의가 거셌다. 일부 교육부 공무원은 대학에 대한 연구지원은 교육부가 주도해야지 과학기술처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와중에 당시 서울대 대학원장인 고 장세희 교수, 서울대 이계준 교수, 과학기술처 경종철 국장 등이 중심이 되어 기초연구교수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협의회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수많은 토론과 협의를 거쳐 드디어 ‘기초과학연구진흥법(안)’을 마련했다. 국무회의와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에서는 별문제 없이 통과됐다. 그러나 법사위원회에서는 기초과학연구의 현실성과 용어의 적절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교육부 장차관의 명확한 동의 의사를 법사위원회에 직접 나와서 밝힐 것을 요청했다. 또 과학기술계 저명교수들 몇몇 분에게 일부 법사위원이 직접 연락해 그들의 지지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이때 필자는 이 나라가 법 만능사회,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관리하는 사회임을 실감했다. 이 같은 난관 속에서 마치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차관 및 실·국·과장 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었다.
특히 이계준 교수, 경종철 국장, 그 당시 실무책임인 박영일 현 과기부 차관 등이 참으로 열정적이었다. 덕분에 89년 12월 30일에 과학기술처와 교육부가 공동으로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을 제정·공포할 수 있었다.
법 제정 이후 약 17년이 지난 지금 80년대와 비교하면 전국 대학에 104개의 우수연구센터(SRC/ERC)가 선정돼 상당한 연구시설이 확보됐다. 또 대학연구비와 교수 1인당 연구비도 크게 늘었다. 과학분야에서 아직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으나 해당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받는 과학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려고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했던 부분은 지금도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함께 노력한 모든 분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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