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차세대 콘솔 게임기 X박스360의 간판 게임 개발을 위해 ‘파이널 판타지’로 유명한 일본 게임계의 거장 ‘사카구치 히로노부’를 영입했다. 계약 조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세계적으로 60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간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표 게임 개발사 엔씨소프트는 지난 2001년 ‘울티마 온라인’을 개발한 세계적인 게임개발자 리처드 게리어트 형제를 비롯한 20명의 개발자를 무려 470억원의 거금을 들여 영입했다. 이후 엔씨소프트는 게리어트 형제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전세계 게임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문화기술(CT) 분야 특급 인재는 국경을 초월한 영입경쟁이 벌어질 정도로 소위 ‘귀하신 몸’이다. 디지털 문화콘텐츠 시대를 맞이하며 단순히 잘 그린 그림과 멋진 장면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기업들이 창의력(Creativity)과 기술(Technology)를 완벽하게 연동할 수 있는 CT 전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넘치는 인력, 효용성은 글쎄=‘총 474개 학교에 1124개의 전공.’ 지난해 7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원장 서병문)이 조사해 발표한 ‘문화콘텐츠 국내외 교육기관 현황조사’ 결과다. 당시 조사에서 168개 고등학교와 137개 4년제 대학, 38개 대학원, 14개 사이버 대학 등에서 문화콘텐츠 전공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연간 배출 인력규모도 2005년 모집정원 총 2만1876명에 2월 졸업생 수가 총 1만647명이었다. 매년 1만명 이상의 문화콘텐츠 전문 인력이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실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현상은 2000년대 들어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 문화콘텐츠 산업이 각광받으면서 대학이 관련학과를 잇달아 개설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산업 발전의 핵심 기반인 인력양성에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곳보다도 한 발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업계에서는 이들 전문학과 졸업생들의 채용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왜일까? 한 게임 업체 관계자는 “대학에서 배출된 전문인력보다는 학력은 낮거나 비전공자라도 업계에서 실무경험을 쌓은 인력을 선호하는 편”이라며 “대학졸업 전문 인력들은 나이나 학력에 비해 실무능력이 떨어져 입사 후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각 대학들은 IT기반 문화콘텐츠를 전공한 강사진이 부족하다 보니 대부분 컴퓨터관련학과를 전공한 교수들을 배치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산업체의 인력을 강사로 채용하고 있으나 이는 강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다 보니 창작과 시나리오 등 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획력을 갖춘 인력보다는 단순 개발자를 중심으로 인력양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비싼 돈을 들여 공부를 하고도 문화콘텐츠 분야 단순 작업자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해외는 철저한 산학 연계=미국과 영국, 일본 등 CT 선진국은 관련 인재를 어떻게 양성할까? 핵심은 철저한 산학 연계다. 미국의 미디어 학자이자 멀티미디어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네그로폰테 박사와 인공지능의 창시자로 불리는 민스키 박사가 1985년 설립한 ‘MIT미디어랩’이 대표적. 이곳에서는 ‘과학과 미디어 예술을 융합한다’는 큰 틀의 목표 하에 영상·음성 기반 인터페이스 기술, 지능형 애니메이션 기술, 음악을 담은 병, 페인터블 컴퓨팅, 전자잉크, 지능형 건축표면, 디지털방송, 가상현실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다.
‘MIT미디어랩’은 100개가 넘는 다국적기업과 단체들의 지원금으로 운영된다. 스폰서 기업은 연구소에서 개발한 모든 특허나 프로그램 등을 무상으로 사용할 권리가 주어진다. 매년 기업과 단체들이 지원하는 금액만도 4500만달러에 이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카네기멜론대학교의 엔터테인먼트테크놀로지센터(ETC)는 좀 더 문화콘텐츠의 본질에 가깝다. 지난 1998년 카네기멜론대 컴퓨터공학과와 예술전문 단과대학이 함께 설립한 ETC는 ‘a graduate program for the left and right brain(좌측과 우측 뇌 모두를 위한 대학원 프로그램)’이라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 문화콘텐츠와 기술에 모두 능통한 인재를 키워낸다.
초창기 8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ETC는 지난해 90명의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분야 석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성장했다. 학생들은 학기 중 일렉트로닉아츠(EA)나 디즈니와 같은 세계적인 문화콘텐츠 기업에서 인턴십을 갖고 졸업 후 대부분 취업한다. 학내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설립돼 성공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는 기업도 많다.
◇고개 드는 국내 CT 인력양성=다행스럽게도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도 해외 선진국처럼 문화와 기술에 모두 능통한 인재를 키워내는 시도가 진행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대학교가 지난 2002년부터 운영중인 ‘정보문화 연합전공 과정’.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주관학과로 경영대학·공과대학·미술대학·법과대학·사회대학·음악대학·인문대학·사범대학·생활과학대학 등 9개 단과대학 총 50여개 학과가 참여하는 과정이다. 해외 선진 교육기관이 그러하듯 서울대 정보문화학부 역시 산학협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넥슨·엔씨소프트·NHN·아트센터 나비 등 유수의 콘텐츠 업계와 삼성전자와 같은 대표 기업과 함께 산학협력 및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업계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이밖에 올 해 성신여대가 문화정보학부를 신설해 다양한 배경을 갖춘 인재의 문화콘텐츠 입성을 돕고 있으며 여타 대학들도 미디어 학부와 복합 문화콘텐츠 관련 학과를 신설하며 미래 먹거리로 떠오른 CT 분야 인재 양성에 적극적이다. 바야흐로 문화콘텐츠 분야 인력 양성이 ‘전문 제작자 양성’ 단계를 넘어 ‘문화콘텐츠 기획자 양성’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CT 인재 양성소, CT대학원
지난해 9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에 문을 연 문화기술(CT) 대학원은 우리나라 CT 인재 양성의 선봉장이다. 문화관광부와 과학기술부가 공동 설립하며 진정한 ‘문화와 기술의 만남’을 이끌어낸 CT대학원은 향후 5년간 문화부가 전체 예산의 50% 이상을 지원하는 등 국가적인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CT대학원의 석사 및 박사과정 학생들은 이미 예술·이공학·인문사회학 등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서울대·KAIST·고려대·연세대 등 국내 유명대학 출신은 물론 스탠퍼드대·코넬대 등 미국 명문대 출신자도 있고 관련 업계에서 경험을 쌓다 온 학생도 많다.
이들은 CT대학원에서 △문화기술론 △디지털건축 △디지털 퍼포먼스 △디지털 서사학 △미디어미학 같은 통합 수업과 다양한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문화와 기술을 접목하고 있다. 첫 신입생 모집 때부터 석사과정 3.5대 1, 박사과정 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인 사실은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들이 CT 분야에 관심이 있음을 방증한다.
관건은 역시 적극적인 산학협력 여부. CT의 핵심가치가 ‘문화콘텐츠 산업을 살찌우는 것’임을 감안할 때 시장에서 활용되지 않는 CT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CT대학원은 내년 수도권 시대를 연다.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내에 준공될 문화콘텐츠콤플렉스에 1200여 평의 공간을 확보하고 대전 본원과 병행 교육을 펼칠 예정. 문화콘텐츠 업체가 많은 수도권 인프라를 활용해 산학협력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엔터테인먼트테크놀로지센터(ETC)의 돈 마리넬리 학장은 “1998년 ETC 설립 당시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의 개념도 막연했고 뭘 가르쳐야할지도 몰랐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ETC 학생들은 이제 현재 EA나 디즈니 등 대표 문화콘텐츠 기업들이 탐내는 인재로 공인받았다. CT대학원 역시 설립 초기 방향성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향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CT 인재 양성소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