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동기를 지나 성장기에 접어든 한국팹리스산업. 세계 팹리스업계의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성큼 올라서면서, 해외 선진업체들과의 본격적 경쟁을 통한 제2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대규모 해외자본유치에서부터 매각 등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있는 것. 빠르게 성장하며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한국팹리스산업의 현상과 미래를 조명해 본다.
90년대 중반 주문형반도체(ASIC) 사업으로 시작한 국내 팹리스 벤처들은 최근 몇 년간 수천 퍼센트의 성장률을 자랑하며 급속도로 발전했으나 아직은 중소벤처기업에 불과하다. 국내 휴대폰·디스플레이 시장은 해외 선진업체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으며, 단일 제품군으로 연간 매출 2000억원을 바라보는 업체들이 등장한 상황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세계시장이 모바일TV 규격의 격전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하면서 국내 팹리스 벤처는 해외 거대업체와 정면승부가 불가피하게 됐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는 업체들 간 뭉치고 흩어지는 이합집산 전략으로 업계 구조를 새로 짜기 시작했다.
디지털 제품의 경박단소 경향에 따라 누가 토털솔루션을 제공하는지가 시장에서 승부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토털 솔루션 보유를 위해 역사가 짧은 국내기업이 선택한 길은 바로 공동개발을 비롯한 협력이다. 특히 공동개발은 멀티칩패키지(MCP)나 시스템인패키지(SiP) 등 3D 패키지 기술이 발전과 함께 가장 실현 가능한 모델로 떠올랐다. 이 뿐만 아니라 지분투자나 공동 마케팅, 공동 프로젝트 진행 등으로 팹리스 업체는 재빠르게 토털 솔루션을 보유하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반면에 독립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부문을 떼어내는 ‘흩어지기’ 전략도 함께 구사중이다. 팹리스 출신이 주축이 돼 만든 팹리스 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상황이다. 이러한 흩어지기 전략은 특정 기술 전문화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독립한 업체가 일정 수준으로 성장했을 때에는 다시 뭉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도 뭉치면서 규모를 키우고 흩어지면서 전문화하는 그리고 다시 뭉치는 선순환 구조를 갖출 수 있게 됐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지만, 산업 전반을 뒤흔들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 아직까지는 이들의 협력이 프로젝트성으로 그치는 상황이며, 그 뒤를 넘어 M&A까지 추진하기에는 절대강자가 없다. 또 국내 팹리스 업체들이 비슷한 분야에 경쟁적으로 몰리는 것도 서로가 힘을 합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 아날로그디바이스에 매각을 결정한 고범규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즈 사장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M&A 등으로 몸집과 기술력을 배가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코스닥 등록을 추진했다” 며 “그러나 국내에서는 조달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작고 업종도 한 분야에 몰려 있어 힘을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실리콘화일·이오넥스·칩스앤미디어 등이 나스닥 등록추진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즈는 외국계 매각의 길을 선택했으며, 많은 기술 벤처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해외 거대기업들은 휴대폰과 디스플레이 부문에서 기술력을 앞세워 강세를 보이는 국내 팹리스 벤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성사는 안 됐지만 인수 의사를 밝혀 거래를 추진했던 업체도 있다. 국내 업체들은 당분간 기술제휴와 공동개발 등으로 협력을 확산시켜나갈 계획이다. 일부 규모가 큰 업체들은 국내기업 M&A를 추진하기도 해, 조만간 국내 팹리스 업계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합종연횡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문보경기자@전자신문, okm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