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팹리스 벤처의 글로벌기업 성장의 지름길은 M&A다.’ 팹리스업계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이다. 실제로 팹리스 설계업체들이 참여하는 회의에서는 어김없이 M&A가 의제로 떠오른다. 그만큼 M&A 필요성에 대해 업계에서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국내에서도 M&A를 성사시킨 업체들도 하나 둘 씩 생겨나고 있으나, 아직은 코스닥 우회 등록을 위한 정도가 대부분이다. 비용절감 등의 효과를 얻을 수는 있지만, 글로벌 기업들과 견줄 만큼의 경쟁력을 갖추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국내 업체 간 M&A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국내 팹리스 업체들의 기업 구조와 M&A에 대해 부정적인 한국형 정서가 그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한 대만 팹리스업계에서는 M&A가 성장모델의 하나로 정착된 것과 대조적이다. 국내 시스템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대만 팹리스업계에서는 팹리스 설계벤처를 설립해 기술력을 축적한 뒤 IP와 함께 팔고, 그 자금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며 “이는 업계의 합종연횡이 일반화돼 있고, 이미 그 중심에 설만한 거대 팹리스가 탄생해 있는 것도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내 팹리스업계의 정서에는 수 천억원을 들여 타 팹리스를 인수하는 것도, 자신이 가진 경영권을 포기하면서 합병에 동의하는 것도 일반화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서 △거대 자본이 개입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간 M&A를 추진하는 방안과 △M&A 펀드를 조성하는 방안 등이 국내 팹리스간 M&A를 활성화하는 방법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황기수 코아로직 사장은 “국내에서는 꽤 큰 규모로 성장한 코아로직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업체를 M&A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치기 때문에 거대 자본이 나서야 한다”며 “이와 함께 인수 대상이 될 기술중심 벤처기업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체 사업을 위해 마케팅 등의 조직을 너무 키우지 말고 아이디어와 기술 중심으로 회사를 만들면, M&A는 활성화될 것”이라며 “벤처를 만들었던 이들은 매각 이후 새로운 사업을 또 만들고 전문화하는 구조가 반복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팹리스 업체들은 인수하고 싶은 회사로 회사 내에 없는 설계자산(IP)을 개발한 벤처기업을 꼽는다. IP를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업체들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IP가 무엇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정부나 협회, 연구소를 중심으로 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IP가 무엇인지를 그려주는 국내 팹리스 IP 로드맵이 필요한 시점이다.
M&A를 저해하는 또 다른 요인은 한국형 기업 정서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몇몇 해외 펀드들이 단기 수익을 내기 위해 국내 기업을 인수, 이 때문에 M&A라고 하면 투기 자본을 떠올리는 등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한국은 벤처기업조차도 창업자(최대주주)가 곧 경영자인 구조가 대부분이며, 창업주는 자신이 차근차근 쌓아올려 성공을 이루고 싶어해 매각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인수를 하겠다는 기업은 많아도 매각을 하겠다는 기업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산업연구원의 주현 연구원은 “시너지를 전제로 한 기업간 M&A는 해당분야 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기업도 하나의 상품으로, 성장을 위해 사고 팔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M&A를 활성화하기 위한 과제로 기업 가치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M&A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기 힘들고, 재정상황과 기술력 전반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어 보완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문보경기자@전자신문, okm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