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이 강화에서 섬유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 역시 나이가 어렸던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부친의 사업을 도왔다. 아침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부터는 부친의 섬유 공장에서 일을 했다.
기억을 거슬러 가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업의 길을 들어선 것 같다. 부친이 직물 공장을 인수를 망설이던 시절, 부친을 설득해 직물공장을 인수했고, 이 때부터 공장장 일을 맡게 되었다. 부친이 일본에서 수입한 실이 부산을 거쳐 강화로 들어오면, 실을 팔고 판매 대금을 수금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일이었다. 판매부터 유통망 개척, 자금 회수 등이 고스란히 내 책임하에 돌아갔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지만, 이 때부터 사업가로써의 수업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이렇다 보니, 나는 사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도, 축구 할 것 없이 운동을 잘했던 나는 한양대학교 섬유학과에 4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집안이 원래 섬유 산업에 오래 종사했던 지라, 학과는 자연스럽게 섬유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섬유 산업이 가장 각광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경쟁률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업 수완이나 발명가로써의 기질은 대학교 다닐 때부터 발휘됐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양단 섬유를 직접 생산했고, 대학교 2학년 때는 일본에서만 생산되던 ‘갑사’를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해 돈도 많이 벌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때밀이 수건’과 ‘삼베옷’을 직접 개발, 생산해 냈다. 섬유학과에서 학업을 배우는 학생이었지만 섬유 공장을 운영하고 신개념의 섬유를 개발하면서, 이런 나의 독특한 이력을 재미있게 생각한 사람들 부탁으로 학생들에게 섬유 관련 새로운 공법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일이 너무 재미있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가득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학교는 한 학기 다니고 일년 정도 휴학하고, 또 다시 한 학기 다니고 휴학하는 생활을 반복하게 되었다. 국내에 최초로 선보이는 다양한 섬유들을 계속 생산해 내면서, 자랑같기는 하지만 나는 강화도에서 섬유 업계의 ‘귀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젊은 나이에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법. 일에 매진하느라 나는 대학교를 약 10년 동안 다녔고,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전 한양대 측에서 한양대학교를 빛낸 인물이라면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았다.
65년도에 한양대를 졸업한 나는 조금 더 일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다. 궁금했던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를 손수 고치거나 개량할 수도 있었다. 졸업하고, 2년 정도 지난 이후 결혼을 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이 계속됐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워낙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변화가 없는 안정적인 삶은 도대체 희열을 느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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