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으로 떠나는 여행]#29

초인이나 괴수와의 대결에서부터 우주 전쟁, 그리고 시간 여행 등등 상상 과학의 세계는 그야말로 놀라운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것은 상상의 세계, 현재로서는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도 우리들은 소설을 시작으로 영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에 이르는 수많은 SF를 통해 그것을 보고 듣고, 그리고 즐기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세계를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다. 바로, ‘가상현실’ 전뇌 세계 속의 현실에서 말이다.

오랜 옛날, 장자(莊子)는 자신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야말로 천하를 자유롭게 노닐다 문득 꿈에 깨어났는데 그 꿈이 너무도 생생했다. 그래서 장자는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일까, 아니면 지금도 나비의 꿈 속에 있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고 한다.우리는 잠에서 깨어 ‘내가 꿈을 꾸었다’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사실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꿈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뺨을 꼬집으면 된다고 하지만, 정말로 사실적인 꿈이라면 무엇보다 꿈인지 아닌지 모른다면 아픔조차 그대로 느껴질 것이다(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아프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꿈을 꾸는지 아닌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 ‘가상 현실’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눈 앞에 펼쳐주게 된다.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주인공 네오를 비롯해 이곳의 모든 이들은 자신이 ‘가상 현실’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가 뉴욕이라고 생각한 곳이 사실은 매트릭스라고 하는 거대한 가상현실 공간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가 이제껏 보고 듣고 체험했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마치,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그들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는 그러한 거짓이 진실에 부딪쳐 결국 드러나게 되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의 삶조차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인 지 그 누가 알겠는가?

영화 ‘다크 시티’ 속의 사람들은 매일 12시만 되면 새로운 기억을 주입받고 그때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새로운 기억이 주입되는 그 순간, 가난뱅이였던 과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갑부가 되고, 어제까지 생판 남이었던 사람을 아내로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그야말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세계라고 할까?하지만, ‘가상 현실’이라는 것이 이렇듯 항상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포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다. 꿈에도 행복한 꿈이 있듯 ‘가상 현실’은 어떤 면에서 현실에선 체험하기 어려운 즐거움과 가능성을 선사할 수 있다.

페라리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싶은가? 아니면, 보잉 747을 몰고 미국을 가는 건 어떨까? 잠수함을 타고 탱크나 전투기 등 실제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것이라도, 가상현실의 세계에서는 원하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다.

‘가상 현실’의 가능성은 현실에 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현실에 없는 것이기에 ‘가상 현실’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스타워즈’의 세계에 빠진 이들이라면, 엑스윙을 타고 제국군과 싸우고, 제다이가 돼 광선검을 휘두르며 격전을 벌이고 싶을 것이다. 혹은 마징가를 타고 기계수와 싸우거나, 수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중간계에서 호비트와 함께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모험에 나서고 용을 물리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가상 현실’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마저도 현실로서 체험하게 하고 재미를 불어넣어 준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가능한 ‘오락’ 뭐 그런 것이라고 해야 할까?

‘가상 현실’의 가능성은 비단 재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상현실’은 수 백 년 전의 과거로 우리를 데려가고, 저 멀리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이나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물론 재미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역사 속의 이야기나 세상의 이모저모를 체험하게 해 준다는 이점으로서 무엇보다 교육적 가치를 갖고 있다. 공룡과 함께 쥬라기를 여행하고, 고래와 더불어 바닷 속을 모험한다. 세종대왕을 직접 만나 훈민정음에 대해 물어보고, 이순신 장군 밑에서 왜군들을 격파한다(물론, 공룡이 아니라 용과 함께 팬터지 세계를 여행하고, 다스베이더와 싸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리고,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야 말로 살아있는 체험, 살아있는 교육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가상 현실’ 속의 체험은, 거리의 제약조차 없애준다. 그래서, ‘붐타운’같은 만화를 보면 도쿄와 홋카이도(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서울에서 제주도 정도?)에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 연인들이 붐타운이라는 가상 도시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는가 하면, ‘공각기동대’에서는 바다에서 바캉스를 즐기면서 회사의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이런 것은 한편으로 정체성의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상 현실’ 속의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밤을 새고 침울한 표정으로 화장실에 앉아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깨끗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고, 심지어 남자가 여자로 변신하고, 동물이 되는가 하면 투명인간이 돼 몰래 숨을 수도 있다.

신체 장애조차 ‘가상 현실’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주지 않는다(지금은 키보드를 써야 하겠지만). 설사 팔다리가 없는 사람이라도 ‘가상 현실’에서는 수퍼맨처럼 활약할 수 있고, 어린애도 마이클 조던보다 멋지게 슬램덩크를 성공시킬 수 있다. 꿈을 현실로 무엇이든 가능케 하는 세계라고 할까?듣다보면 엄청나게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러한 ‘가상 현실’은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매트릭스’처럼 오감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미 조종 게임을 통해 비행기를 조종하고 자동차를 타며 심지어 로봇까지 조종할 수 있다.



게다가, MMORPG의 세계에서 우리들은 팬터지나 SF를 무대로 한 거대한 세계에 들어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쳐내기도 한다. 인터넷 속의 ‘나’는 취향에 맞게 꾸며진 존재이며, 아바타라는 대상이 나를 대변한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무제한으로 형태를 바꿀 수 있으며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지울 수 있는 상황. 마치 가장 무도회처럼 가상 현실의 ‘나’는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행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수많은 잘못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욕설이나 비방 같은 인신공격에서부터 욕설로 게시판을 도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해킹이라는 수법을 이용해서 좋지 않은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는 만큼, 그러한 위협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테러범들조차 전뇌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겉으로는 평범한 직원처럼 보이는 이가 사실은 악질 해커일 수도 있고, 훌륭한 자선 사업가가 실제로는 전뇌 사회의 범죄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바이러스를 자신이 치료하고 돈을 버는(그야말로 병주고 약주는) 일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디지털 세상에서 넘쳐날 수 있는 버그 역시 큰 위협이 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전뇌사회에서도 이러한 범죄나 오류를 퇴치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된다(우리나라만 해도 사이버 경찰대가 존재한다).

‘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등의 작가인 톰 클랜시의 ‘넷포스’는, 가까운 미래 전뇌세계에서 전개되는 테러와의 전쟁을 멋지게 연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밖에도 ‘해커즈’ 같은 수많은 작품에서 해커와 경비의 대결을 그려나가고 있으며, 만화 ‘붐타운’에서는 완벽한 수준의 가상 도시에서 버그를 처리하고 해커들을 체포하는 디버거들의 활약이 즐겁게 그려진다.

‘가상 현실’ 그것은 꿈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이 순간 현실로서 변모되어가고 있다. 보다 다채롭고 편리하게 변모될 전뇌 공간. 그리고 그 미래는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가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빛이건 어둠이건, 결국 모든 것은 가면을 쓰고 상상을 즐기는 바로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니까 말이다.

<전흥식 pyodogi@sfwa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