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선순환식 친환경체제 서둘러야

 국내 전자업계의 친환경 대응체계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친환경 소재 개발이나 이를 채택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고질적인 갑을 관계식 납품 관행 때문이다.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부품의 납품 단가가 종전과 동일한 가격대로 묶이거나 오히려 깎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친환경체제 대응에 들어가는 비용부담이 고스란히 부품·소재업체에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이 특정유해물질사용제한(RoHS) 지침을 예고한 이후 정부와 업계는 합심해서 발등의 불처럼 여겨져온 친환경 소재와 부품 개발에 나서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인쇄회로기판의 접착제인 납을 주석합금으로, 커넥터 도금도 고가의 금으로 대체하는 전향적인 변화가 있었다. 반도체 패키징도 무연 솔더링으로 바꾸었다. 불연재인 브로민도 인으로 대체했다. 수출당사자인 완성품 업체도 준비에 만전을 기해 왔다. 국제수준의 유해물질 분석과 측정 기술은 물론이고 인증체계에서도 국제적인 평가를 획득했다. 친환경 제품이라는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는 자신감도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정작 RoHS 지침이 발효된 이달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려했던 종속적 납품 관행만큼은 개선되지 않은 결과다. 지난해부터 관련업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친환경 대응을 위해 최소한 10% 이상의 비용이 추가되는만큼 완성품 업체의 고통분담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요구해왔다. 정부도 이에 대해 충분히 납득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만큼 이번에는 비용전가 우려가 기우에 불과할 것으로 내다봤다. 더욱이 지난해부터는 정부와 대기업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을 부르짖으며 한껏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왔다.

 친환경 부품 단가 강요는 놀랍고도 실망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모든 완성품 업체가 친환경 비용을 납품 업체에 전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 대기업과 영세한 1·2차 협력사의 횡포라고 여기고 싶다. 정부도 상생협력이 아직은 1차 납품업체에 국한돼 있어 2·3차 납품업체로까지 확대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 영세한 부품 소재업체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생협력이 이들에까지 혜택을 줄 때쯤이면 과다한 친환경 비용부담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정상적인 경영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친환경 대응과 상생협력 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정부의 친환경 대응은 발등의 불을 끄기에 급급한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정책에 치우쳐 왔다. EU의 RoHS 지침이 발표되자 서둘러 관련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중국이 내년 3월 이른바 중국 RoHS라는 ‘전자정보제품오염방지관리법’을 시행한다고 하자 전국 순회설명회를 연다고 떠들썩하다.

 친환경 대응체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투명회계와 함께 지속가능한 경영의 필수요건으로 간주돼 왔다. 지금부터라도 수출만을 위한 친환경 대응이 아니라 국내 산업계의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장기적이고 선순환적인 체계구축에 나서야 한다. 총체적인 친환경 체제 전환이 대세를 이룰 때에야 비용분담의 인식과 공감대가 확산될 수 있다. 우리보다 대응 준비가 뒤떨어진 중국조차 내년에 RoHS를 무리하게 시행하려는 것도 산업 전반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위해서다.

 상생협력도 건강한 거래관계 정착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일부 대기업의 협력사 지원이나 혜택만으로는 대·중소 기업 상생은 한계가 따르게 마련이다. 부품과 완성품 업체의 상생협력은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문제가 아니다. 시장의 원리를 거스르는 갑을 관계식 거래관행이 지속되느냐 개선되느냐가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