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호 전자부품연구원장 chkim@keti.re.kr
전자부품산업 연간 400억달러 수출시대로의 진입, LCD·PDP·OLED 평판 디스플레이 분야 트리플 크라운 달성, D램에 이어 낸드 플래시 메모리 분야 세계 시장 석권 등등. 언론 지상을 장식했던 수많은 수식어가 의미하듯 우리나라가 세계 전자부품산업계를 이끄는 중추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심지어 전자부품산업이 드디어 확실한 안정궤도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진단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규모의 성장이라는 외피를 한 겹만 벗겨 보더라도 업계 종사자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생산라인은 밤낮 없이 바쁘게 돌아가지만 수익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엄살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무한 가격전쟁이라는 거대한 붉은 파도가 전자산업 전반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30달러 이하 휴대폰, 100달러대 노트북PC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후발주자의 본격 가세, 기술 간 주도권 다툼으로 인한 무한경쟁의 굴레 속에서 가격하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격하락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수요는 증가하는데 매출은 줄어드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부품들이 원칩, 모듈화됨에 따라 단순 수동부품의 필요성 자체가 없어진다. 결국 비용절감을 통한 가격 인하만이 경쟁력 확보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이는 레드오션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가격경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해서 후발 개도국보다 높은 노동 및 토지비용을 감수하고 무작정 레드오션의 전장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조금 전에 한 겹의 외피를 벗기듯 다시 한 겹의 껍질을 벗겨보면 퀄컴·인텔과 같이 이 굴레에서 자유로운 기업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이들을 가격경쟁의 전쟁터로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이 기업들이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격경쟁은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자들만의 전쟁터였던 것이다.
과거 IBM이 호환성 추구를 통해 애플이 주도하고 있던 컴퓨터 시장을 장악했지만 인텔 등 원천기술을 확보한 일부 능동 칩 업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업체가 장기 고수익 창출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원천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원천기술 확보가 바로 고수익 창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블루투스 기술이 개발된 것은 수년 전이지만 작년에야 비로소 휴대폰용 무선 헤드세트가 본격적으로 나왔다. 공백기 동안 후발주자들의 기술추격이 벌어졌다. 적절한 킬러 애플리케이션 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원천기술 확보는 중요하지만 시장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무한 가격경쟁이라는 위기하에서 글로벌 무대의 중심 주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느냐는 ‘시장 지향적 원천기술’의 확보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발전 트렌드와 소비자의 니즈 변화를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고 창의적인 아이템을 발굴, 원천기술 개발을 통해 진입장벽을 강화해야 한다. 위기에 대한 해답은 ‘기본에 충실하자’이다. 모두 힘을 모아 새로운 블루오션의 바다로 나아갈 때다.
장동준기자@전자신문, dj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