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박경수 피에스케이 사장(1)](https://img.etnews.com/photonews/0610/061009032116b.jpg)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일본에서조차 거절한 300㎜ 장비를 우리가 어떻게 개발합니까. 이제야 제대로 된 200㎜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1998년 초 국내 반도체 소자업체로부터 300㎜ 애셔 장비 개발 요청이 들어왔다. 이 사안에 대한 임원진들의 의견은 예상했던 대로 ‘반대’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200㎜ 장비를 만들어 안정적으로 납품하기 시작한 우리로서는 무리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IMF 한파로 피에스케이의 매출 또한 3분의 1로 떨어져 자금력도 어렵던 시기였다. 당장의 개발비는 뒤로 하더라도 반도체 장비의 특성상 데모와 양산까지 짧게 잡아도 2년. 그 시간 동안 소요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반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산업의 쌀’로 불리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또 국내 반도체 소자업체들의 과감한 투자로 이룬 1988년 세계최초 16M D램 개발 성공을 기점으로 64M, 256M D램을 연이어 개발해 반도체 강국 한국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눈부신 성장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듯 국내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생산효율성 증대를 통한 원가 절감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6인치(150㎜) 웨이퍼에서 그보다 1.8배 높은 생산성을 내는 8인치(200㎜)로 갔고, 이보다 2.25배 생산성이 높은 12인치(300㎜)로 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피에스케이는 개발 초기부터 300㎜ 장비 개발을 목표로 했었다. 200㎜ 장비를 만들었던 것도 300㎜ 장비를 더 잘 만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개발 시기였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가, 아니면 시기상조인가? 용단이 필요했다.
당시 우리보다 앞선 기술력을 갖춘 미국 업체들조차도 연구소 레벨에서의 300㎜ 장비 개발에 그쳤을 뿐, 양산까지는 성공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200㎜장비 안정화를 이뤄낸 우리가 300㎜ 장비 개발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들보다 앞서 양산에 성공한다면, 그것만이 우리가 ‘글로벌 No.1’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나의 머리와 가슴속에 밀려 왔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쳐지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지식·기술집약산업이 바로 이 반도체산업이다. 선두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결정의 매 순간마다 이루어 지는 분야이기에 이 위기가 반도체 전공정 핵심장비 중 하나인 애셔 장비시장에서 피에스케이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 초,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라고는 전무한 실정에서도 국내 최초 애셔 장비 국산화에 성공한 우리이지 않은가!’
‘된다! 하면 된다!’ 다시 직원들을 독려했다. 때로는 늦은 밤 소주에 마른 안주를 사들고 직원들 기숙사에 찾아가 술 한잔 기울이며 쌓인 피로를 풀며, 밤을 낮 삼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기를 2년. 1999년, 피에스케이는 드디어 우리 이름 아래 ‘세계 최초 300㎜ 전공정 애셔장비 개발성공’이라 는 타이틀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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