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피에스케이 박경수사장(5)

[결단의 순간들]피에스케이 박경수사장(5)

 2001년 당시 해외 반도체 장비시장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의 브랜드 인지도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만에 하나 장비에 문제가 생겨 웨이퍼생산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을 겪게 되는 반도체 업계의 특성상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의 중소업체에 선뜻 납품을 계약할 회사는 없었다. 그래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가짐으로 문을 두드리기를 1년여. 드디어 단 한번의 기회를 얻었고 우리는 그 기회를 발판으로 ‘세계 애셔장비업체 3위(2005년 가트너 기준)’를 향해 더 높이 뛰어올랐다.

 2001년은 반도체 산업의 암흑기라 불렸을 정도로 극심한 불황의 해였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세계 굴지의 반도체 소자업체들을 가진 반도체 강국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세계 반도체 경기가 국내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밀접한 연관산업인 반도체 장비 산업 또한 그 조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물론 피에스케이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장비업체 중 하나로서 입지를 다지면서 높은 내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 의존하다 보니 경기변동에 따라 기업의 매출변동이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더 큰 꿈이 있었다. 물론 해외진출을 통해 안정적 매출처 확보라는 성과도 올리겠지만 ‘세계 제 1의 반도체 강국 - 한국’이라는 이름에 반도체 소자업체만이 아닌 반도체 장비업체의 이름을 올려야겠다는 꿈을 현실화하고 싶었다. 실제로 기술력에서나 회사 조직력에서 가능하리라는 자신감과 신념이 있었다.

 목표로 삼은 해외시장은 ‘아시아’. 그 교두보는 대만이었다. 당시 한국과 대만, 일본이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대만 시장은 국내시장의 2∼3배 규모에 달했다.

 우선 대만의 한 에이전시와 계약을 체결하고 거래를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대만의 높은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높은 장벽은 92년 중국과 수교한 이래 쌓여진 대만인들의 한국에 대한 배신감 또는 악감정이었다.

 게다가 우리와 거래를 하는 실무진들이 바로 그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막 진출했던 세대들이었기 때문에 그 감정의 골은 더욱 깊었다.

 또한 ‘한국’과 ‘피에스케이’라는 이름 모두 고도의 기술력과 신뢰성을 요하는 전공정 반도체 장비분야에서 네임 밸류를 갖고 있지 못했다. 600여단계를 거쳐야 하는 반도체 생산공정에 요구되는 섬세함을 커버해야 하는 반도체 장비산업의 특성상 해외 거래처가 단 한군데도 없는 우리를 믿고 맡기는 것은 당연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직원들에게 이를 성장통이라고 생각하자며 격려했다. 드디어 1년여 만에 세계 2위 파운드리 업체의 수석부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파운드리 업계 최고의 파워를 지닌 사람으로 그 앞에만 서면 전 직원이 벌벌 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다. 우선 다른 업체가 따라올 수 없는 우리제품의 강점으로 ISBP를 위시한 국내외 특허로 제품력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해서 데모장비 납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리 직원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맞아 3개월 만에 모든 데모장비 검증을 완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1년간의 데모 테스트 결과는 대 만족이었고 우리는 대량 납품 수주를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 중 해외업체로부터 이 같은 대량수주를 받은 것은 피에스케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벽에 구멍을 뚫기 위해선 힘과 함께 날카로운 송곳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갈고 닦아 날을 세우고 구멍을 뚫을 자리를 정한 다음에는 모든 힘을 집중하는 것, 그것은 기업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kspark@psk-in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