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지난 25일 오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사회교육원에서 영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학생들은 이십대 초반부터 사오십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바로 과학기술부가 개도국 발전을 위한 공적개발원조(ODA) 프로그램 일환으로 지난 9월 발족한 과학기술지원단(Techno Peace Corps) 1기 대원 15명이다. 1기 과학기술지원단 대원들은 대학 교수, 연구원, 전직 벤처 대표, 약사, 건설회사 직원, 공대 대학원생, 공무원 등. 다양한 이력만큼이나 인생 스펙트럼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미래는 도전한만큼 달라진다는 믿음, 남을 도움으로써 내 삶이 윤택해진다는 가치관만큼 똑같다.
수업이 끝나고 인터뷰를 위해 교육원 앞 잔디밭에 모두 모였다. 가을 햇살 아래여서일까. 꿈을 말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났다. 얘기하는 어느 누구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섣불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장미빛을 단정짓지도 않았다. 희망을 품고 있기에 그들의 미소는 더욱 눈부셨다. 아직 막연한 계획이지만 하루 하루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희망은 그저 바램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도전였다.
# 이공계 취업 위기요? 우물 안 얘기죠.
김민규 대원(33)은 세포공학과 농학을 전공하고 해부학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생명공학(BT) 전문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를 두고 말레이시아 과학기술지원단 파견을 지원한 그는 “우리나라 BT가 세계적 수준이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BT분야 고급인력의 자리가 없다”고 했다. 김 대원은 “한국의 첨단 정보통신, 생명공학 기술을 개도국에 전파하고 이공계 인력의 세계 시장 진출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지원단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건설회사를 다니다 지원한 백상은 대원(33)도 이공계가 대접받지 못하는 국내 현실이 싫어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백 대원은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공계 출신이 기업에서 승진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과학기술단원 봉사 후 2∼3년 간 캄보디아 건설 관련 업무에 종사하면서 현지 문화와 언어를 익혀 나만의 경쟁력을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인생의 후반전은 남을 돕는데 쓰고 싶어
박영배 대원(48)은 농학박사이자 농촌진흥청 연구원이다. 시쳇말로 ‘철밥통’인 공무원 신분이다. 십여 년 후엔 퇴직을 하고 안정된 노후을 보내게 될 나이에 그는 또 한번의 도전을 감행했다. 박 대원의 꿈은 과학기술지원단원으로 필리핀이나 태국의 대학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감자재배나 잡종채소종자개량 기술을 전파하는 것이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절반이 지났더군요. 후반전을 앞선 전반전보다 더 의미있게 보내야 보람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 대원은 “대한민국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지만 내가 꼭 필요한 다른 세상에 가서 내가 가진 과학기술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전후세대인 박 대원은 30∼40년 전 시대상황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그땐 미국한테 원조를 참 많이 받았어요. 기초과학, 산업기술에서부터 하다못해 쵸콜릿까지(웃음).... 그런데 이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를 도와줄 만큼 발전했으니 참 기뻐요.”
가톨릭대 연구교수직을 포기하고 지원한 최고령 합격자 신형순 대원(50)이나 벤처 경영인 출신인 서응수 대원(47)도 인생의 이모작을 위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행을 선택한 케이스다.
# ‘가르치러’가 아니라 ‘배우러’ 간다
오정수 대원(31)에게 선진국은 우리나라가 배워야 할 대상이었다. 대학 시절 미국 피츠버그대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KAIST 전산학과 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이나 일본의 첨단 과학기술을 접할 기회도 많았다. 그러나 고려대 재학 중 태국 AIT(Asian Institute of Technology)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가 몇년 간 몸으로 체험한 동남아시아는 그에게 오히려 선진국보다 더 큰 문화적 충격을 줬다.
“동남아시아는 미개척지이죠. 사업 기회가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늘 선진국에서만 배울 점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도 오히려 배울 게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생명공학, 컴퓨터공학(학사)과 기술경영(석사)을 전공하고 산업자원부 한국기술거래소 전문위원으로 근무해 온 오 대원은 “기술이전사업화 업무를 담당한 경험을 밑천삼아 동남아에 우리 기업의 기술을 이전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원성욱 대원(38)은 국제협력단 일원으로 캄보디아 국립대(NPIC)와 라오스 국립대의 설립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원 대원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십여 차례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가르치기 보다는 많은 것을 배우고 얻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가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 잃은 것들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최연소 지원자인 송행진(22) 대원은 2년 전 스위스연방공대 인턴연구원으로 근무한 경험이 과학기술지원단원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송 대원은 “해외 인턴 경험이 연구에 많은 자극을 줬다”며 “이번 동남아 파견도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아 지원했다”고 말했다.
조윤아기자@전자신문, for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