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채연석 前 항공우주 연구원장(­5)

필자(왼쪽)가 로켓개발 당시 김시중 과기부장관(가운데)에게 로켓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필자(왼쪽)가 로켓개발 당시 김시중 과기부장관(가운데)에게 로켓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1989년 12월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을 다발로 묶은 4단 로켓을 만들어 인공위성 발사를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록 위성 발사는 실패를 했지만 스커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던 북한에게 위성 발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에는 충분했다. 실제로 1990년 초 북한이 위성발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중국의 우주과학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자력 발사하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우리도 위성의 자력발사를 서두를 것이다. 이때를 대비해서 어떻게든 우주로켓 개발기술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인 70년대 초부터 미사일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 고체 추진제 로켓 기술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급의 대형 고체 추진제 로켓은 곧바로 중거리 탄도탄 등 대형 미사일로 손쉽게 변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평화적인 목적의 위성 발사라고 해도 대형 고체 추진제 로켓의 개발에는 국제적으로 많은 저항을 받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위성을 발사하려면 군사용보다는 평화적인 목적에 더 적합한 액체 추진제 로켓만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액체 추진제 로켓은 주로 발사 직전에 추진제를 로켓에 주입하는데 주입시간이 오래 걸려서 아무 때나 바로 발사할 수 있는 고체 로켓보다 군사용으로는 부적합한 반면 성능을 쉽게 조절할 수 있고 대형화를 쉽게 할 수 있는 등 장점도 많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액체 로켓기술이 전무한 상태였다. 하루빨리 액체 로켓기술과 관련 과학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러시아가 막 개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액체 로켓기술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으나 예산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액체 로켓기술을 기초부터 독자적으로 확보하기로 했다.

과학로켓 ‘KSR-I’의 추진기관의 개발이 끝나자마자 최소인원만 ‘KSR-II’의 개발에 참여를 시키고 나머지 인원은 액체 추진제 엔진 연구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유학 가서 액체 로켓을 공부한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액체 로켓이 필요할 날이 반듯이 올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여기에 투자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과학 로켓의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의 지원도 어려울 때라 추가로 액체 로켓 관련 연구를 지원받기는 어려웠다. 이때 초대 항공우주연구소장을 지낸 황보 한 한국통신 위성사업단장이 무궁화 1호 사업을 하며 국내의 위성기술도 발전시키겠다고 기초 연구 과제를 만들어 연구소를 지원해 줬다.

이 연구의 일부로 추력 2.2㎏짜리 위성 자세제어용 추력기를 개발했다. 추력기는 촉매에 하이드라진을 뿜어줌으로써 연소반응이 발생하는 아주 기초적인 액체 로켓엔진이었다.

당시 추력기 시험시설 제작비 1억원을 마련 못해 방학 때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함께 연구원들이 직접 만든 시험대에서 겨우 실험을 마쳤다.

yschae@ka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