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새로운 회사 간판을 걸며
“내일까지 5억원을 갚지 못하면 부도가 납니다.”
이 한통의 전화에 놀라서 허겁지겁 은행에 뛰어갔지만 일은 이미 벌어져 있었다.
필자가 컴퓨터 그래픽 학원에서 원장으로, 그리고 용역사업의 사업 책임자로 일하고 있을 당시 일본의 투자 파트너는 사업 책임을 전적으로 맡겼지만, 자금 관리와 대표이사 도장은 친인척인 임원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임원이 일본의 투자 파트너와 필자도 모르게 회사 자금과 당좌수표를 친구들에게 빼돌린 것.
회사가 망하면,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당장 어떻게 해야 하나, 나를 믿고 맡긴 진행 중인 몇 개의 용역 프로젝트는 또 어떻게 하나 등등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 속이 멍해져 왔다. 6년의 공백을 딛고 다시 사회로 나온 지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인데, 어처구니 없게도 이런 일로 자신과 회사가 망하게 된다는 공포감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물러나는 대신, 어떻게 하든지 사태를 수습하고 싶었다. 길은 창업밖에 없었다. 그러나 준비된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고, 당시 컴퓨터그래픽 업종은 초기시장이었으므로 충분한 자금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창업을 준비해 온 사람들에게도 창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었던 필자가 창업을 결심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가족은 물론, 함께 할 직원들도 설득시켜야 했다.
필자의 인생은 물론 가족들의 인생도 걸린 일이었기에, 창업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일단 창업으로 결단을 내리고 나자, 모든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힘든 시기였지만 또한 흥분된 순간들이었다.
회사를 만들고 나서 6개월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한 회사의 대표라는 책임과 의무가 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더욱이 90년대 초반의 ‘여사장’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편견의 벽이 높은 자리였다. 여성의 취업이 남자들의 취업자리를 갉아먹고 있다고 신문에서 공공연하게 칼럼으로 쓰여지던 시기. 금융기관에서 돈이라도 빌리기 위해서는 담보를 제공하고도 필자를 대신해 줄 남편, 친정아버지, 친정 동생들까지 아는 남자들을 줄줄이 연대 보증으로 내세워야 했다.
창업의 어려움과 여사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어려움이 보태져 하루 하루가 견디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먹은 대로 한다는 자부심에 마냥 행복했다. 지금도 제이씨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과 면담을 할 때면 반드시 하는 얘기가 있다.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해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도 못말린다. 그러면 저절로 주인이 되고 행복을 맛보게 되며 바로 그것이 성공이다”라고.
그래서 우리 직원들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마케팅일에 도전한다. 그러한 문화가 바탕이 되어, 국내 최초로 선보인 온라인 농구게임이자 온라인 스포츠 게임의 대명사인 ‘프리스타일’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 말겠다는 필자의 의지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창업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 만약 내가 창업이라는 결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필자도 없고, 오늘의 제이씨엔터테인먼트도 없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게임도 자기가 절실히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라’ 어려움이나 위기는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머리로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다. 지금도 필자는 94년 제이씨의 전신인 청미디어를 설립할 때 그때의 느낌으로 직원들을 격려한다.
“위기는 기회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뜨거운 열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라.”
yskim@joycit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