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혁신으로 승부한다(4)

[신년특집]혁신으로 승부한다(4)

세계적인 발명가 에디슨이 말한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천재라도 불굴의 도전정신과 노력 없이는 과학기술의 ‘꿈’을 이룰 수 없다. 변변한 자원 하나 가진 것 없는 우리 나라의 희망은 바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밤을 낮 삼아 24시간을 일하는 산·학·연의 과학기술 인력이 있다. 이들의 꺼지지 않는 창조력의 산실 24시를 취재했다.  

#1. 출연연에는 스위치가 없다(?)

‘밤 10시 기준 보통 300명. 적으면 200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원장 최문기)의 평일 야간 근무자 현황이다. ETRI 연구인력은 2300명이다. 통상 전체의 10%가 넘는 직원들이 밤을 낮 삼아 근무하고 있다는 계산이다. 지난 연말에도 밤 12시를 넘기는 직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ETRI에는 전등 스위치가 고장났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지난해 모트 금속 절연체 전이(MIT)이론을 규명했다, 진위 논란에 휩싸였던 김현탁 박사가 이끄는 3동 MIT연구실과 ETRI 최고의 기술료 수익을 올렸던 7동 디지털액터연구팀. 저녁 늦게 찾은 이 실험실에서는 밤을 대낮처럼 밝히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연말이어서인지 군데군데 휴가간 빈자리가 보이긴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한해 마무리 연구가 한창이다.

“연구결과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상용 제품으로 입증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연구원 8명이 마음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최근 MIT 이론을 바탕으로 배터리 폭발방지 소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김 박사의 지난 한 해를 돌아본 소회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지요. 박막을 만들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포토 공정을 통해 패턴화해 이온 빔으로 깎아낸 뒤 다시 전극을 올려 씻어내는 일에만 꼬박 이틀이 걸립니다. 실제 테스트는 몇 초밖에 안 걸리는데 말이죠. 이런 과정을 지난 1년간 수백번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김 박사의 퇴근 시간은 보통 밤 9∼10시, 새벽 별보고 퇴근하는 날도 샐 수 없이 많았다.

 김 박사의 기술은 최근 과학기술논문인용지수(SCI)가 7.5나 되는 미국물리학회 저널 ‘피지컬 리뷰 레터(PRL)에 관련 논문이 실렸고, 이달 8일에는 미국응용물리학회지에도 논문이 게재될 예정이다.

 “1년간의 고생도 성과가 나와줄 땐 봄눈 녹듯 사라진다”는 것이 김 박사와 함께 일하는 채병규 선임 연구원의 너스레다.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는 최상국 책임연구원도 “전지폭발 실험을 할 때였는데 어찌나 자장면이 먹고 싶던지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기관장 지시사항까지 어기고 딱 한번 반입한 적이 있다”며 조심스레 눈치보며 실험실의 살가운 풍경을 전한다.

 이와 함께 지난해 ETRI 연구원으로 최고 기술료 수익을 올린 7동 디지털 액터연구팀의 이인호 팀장은 “몸이 축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야근을 허락받으라 했다”며 “박상욱 연구원의 경우는 영화 개봉 일정에 맞춰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하느라 열흘 가량을 집에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부모님이 찾아왔다”고 당시의 민망함을 털어놓는다.

 이 팀은 최근 개봉한 영화 ‘중천’의 CG 750 장면을 모두 책임졌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호로비츠를 위하여’ ‘한반도’ 등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국내 CG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박사팀의 올해 대기업 아이템인 전자파 고감도 센서 개발과 이 팀장의 CG캐릭터 개발 의지에 희망이 넘쳐난다.

#2. 교수-학생 밤샘 미래 밝아

 크리스마스 연휴가 하루 지난 26일 밤 들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최양규 교수 실험실. 이곳에서는 20여명의 학생이 모여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노전자소자의 응용 연구가 한창이었다.

 종무식이 코앞이었지만 학생들의 눈망울에는 학구열과 무엇인가를 일궈내려는 투자로 가득 차 있다.

 새해 미션은 지난해 개발한 나노 와이어를 이용한 나노바이오 센서 및 나노전자소자(FinFET)의 미진한 응용분야 연구의 마무리다.

 지난해 최 교수팀은 나노종합팹센터 연구진과 공동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새로운 구조의 3차원 3㎚급 ‘나노전자소자’를 개발해 세계 과학기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상온동작 소자는 물질에 상관없이 1.5㎚이하가 되면 0과 1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3㎚급 소자는 기술 개발의 최고점까지 다다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다시 출근한 최 교수의 설명이다.

 최 교수의 R&D는 밤이 돼야 시작된다. 낮에 학생들과 부딪치며 살고, 밤에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이중생활이다. 하루를 두 번 사는 셈이다.

 “가족과 소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만큼은 반드시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합니다. 남들보다 더 바지런을 떨면 이런 생활도 가능합니다.”

 최 교수는 날을 많이 새는만큼 체력관리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체력이 없었다면 삼성전자가 최근 상용화한 트리플 게이트인 512M비트급 D램과 S램도 반도체 소자도 최 교수가 지난 99년 미국 버클리대 재학시절 세계 처음 제시했던 모델도 나올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최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이수 중인 류승완씨(반도체 소자 박사과정 1년차)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날을 새다시피 하지만 매주 빼놓지 않고 운동을 한다”며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가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류씨와 동기생으로 삼성전자 임원이 꿈인 한진우씨(반도체 소자 박사과정 1년차)는 “교수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졸업해도 될 것 같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힘든 줄 모르고 일한다”며 “삼성전자에 가서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이끌어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들이 있는 한 세계 반도체 시장의 한국 리드는 계속될 것이다.

#3. 시간으로 승부하는 벤처기업

 대덕밸리협동화단지 한 쪽에 자리 잡은 산업 및 의료용 특수 디스플레이 전문업체 디앤티(공동대표 이양규·김광선). 이 회사는 며칠 전 벤처기업의 1차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코스닥 문턱을 넘는 데 성공했다.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과 어드밴테스트를 주고객으로 둘 정도로 탄탄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새해를 며칠 앞둔 지난달 27일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유독 불빛이 환한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이 회사의 심장으로 불리는 기업부설연구소.

 200평 남짓 돼 보이는 큼직한 사무실에는 늦은 시각임에도 10여명의 연구원들이 분주히 오간다.

 중앙에 있는 개발 회의실에서는 급한 사안이라도 있는 듯 연구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우리가 개발하는 제품은 동일 제품이라도 규모가 다르고, 그 안에 들어가는 SW도 각기 다릅니다. 주문자인 기업체가 원하는 제품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적절한 시간에 제품을 제대로 수요자에게 공급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권오종 부장은 정말 급할 때는 늦은 밤 시간이라도 현장 지원을 나가고, 밤샘 개발 작업을 하는 것도 다반사라고 긴박감을 전한다. 영업인력들이 힘들여 수주해 온 기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해당 업체에서 제품 샘플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납기일을 못 맞추면 낭패다.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만큼 다른 산업과 달리 산업용 디스플레이 시장이 진입 장벽이 높다는 방증이다. 비록 당시에 힘은 들지만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최근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한 것도 기쁜 일이다. 비전이 있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권경웅 소장도 말을 거든다.

 “우리 회사의 주고객은 세계적인 기업체들입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연구원들이 자유자재로 영어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강점입니다.”

 회사 초창기 당시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연락이 들어오자마자 24시간 내 미국 IBM 현지에 도착, 문제를 해결해 주고 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당시에 쌓은 신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권 소장은 “그동안 의료용 모니터 개발에 주력해왔지만, 앞으로는 부가가치가 높은 선박용 모니터 개발에도 눈을 돌릴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이양규 사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도 작지 않아 보이는 디스플레이를 중앙에 놓고 연구원들과 토론이 한창이다.

 이 사장은 “R&D가 비즈니스의 시작”이라며 “기술 없이는 선도적인 마케팅이 될 수 없다”고 R&D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내년 상반기 양대 시장인 미국과 유럽에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겠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의 일환이다.

 이쯤 되면 지구상에서 명실상부한 24시간 연구개발 체제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이 사장은 “미국과 유럽에 기술개발 거점이 구축되면 그동안 구축해놓은 세일즈 마케팅 체제에 더욱 힘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고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R&D 체제를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대전=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 대전=신선미기자@전자신문, sm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