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순간들]곽수일 서울대 명예교수(1)

[결단의순간들]곽수일 서울대 명예교수(1)

<1>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우리 6남매 형제 중에서 유치원을 다니지 못한 못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교육이 모자라거나 학교다닌 기간이 제일 짧은가 하면, 그 반대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지난해 8월 정년까지 학교에 다닌 기간이 60년이나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유년시절 5년과 제일은행에 근무하던 3개월,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MBA를 받고 교직을 임명받을 때까지 6개월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학교에 다닌, 학생(學生)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오며 부모님께 드리는 인사 역시 “저 학교 갑니다”였다. 요즘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한 달에 한 두 번 학술원에 나가고 학술원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도 하고 있으니, 내 삶은 일평생이 학생이요 교수이며 연구원으로 보내는 셈이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크게 몇 가지 계기와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다.

그 첫번째는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 MBA를 위해 유학을 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로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보다 가난한 때여서 대학 강의가 지금과는 방법이나 내용에서 많이 뒤떨어져 있을 때였다. 따라서 유학길에 오르는 것은 대학 졸업생들의 꿈이었지만, 유학 경비 등 경제적 문제를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외환보유고가 몇 백만달러에 그칠 때이므로 그 아까운 외화를 유학생 경비로 환전해 주는 것을 극히 꺼려했었다.

이에 따라 누구든지 유학을 가려면 문교부에서 실시하는 유학생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내가 유학생 시험을 치른 것이 1962년. 초등학교에 3000여명이 모여 영어, 국사 등을 봤다. 합격자는 불과 15명에 그쳤다.

일단 시험에 합격되더라도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 요금을 감당하는 것도 관문이었다. 이 경우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두드린 곳이 아세아재단이었다. 나도 다행히 아세아재단에서 비행기표를 주는 장학금을 받아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제트 여객기를 타고 서울에서 동경을 거쳐 하와이에서 급유하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을 가는 장도에 올랐다. 당시는 한번 유학을 간다고 떠나면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정착할 때라, 서울을 떠날 때는 출발지인 김포공항에 족히 버스 한 대에 탈 정도의 엄청난 환송객들이 나온 것 같다.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공항 스피커에서 나오는 영어가 귀에 들어오자, ‘그래도 지낼만 하겠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AFKN 라디오를 열심히 들은 덕이었던 것 같다.

여객기 스케줄 관계로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를 지내고 가야 한다며 비행사 직원이 선더버드 호텔이라는 곳에 데려다 줬다. 공항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글자 그대로 ‘문화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자동차 속도가 40㎞였지만, 그 곳에서는 120㎞ 이상 속도를 냈다. 그 느낌은 지금도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결국 자동차 안에서 병아리 새끼같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미국의 첫 번째 맛을 본 것이다. 그 때 달린 고속도로가 US 101으로 이후 늘 오가는 길이 됐다. 아마 요사이 한국학생들은 미국 고속도로를 거리낌없이 질주하겠지만 1963년만 해도 나에게는 고속도로 자체가 첫 번째 ‘문화충격’이었다.

skwak@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