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입국의 전도사, 국제 학술활동의 대가, IT강국을 이끈 숨은 공로자’
이병기 서울대 교수(56·전기공학부)를 대변하는 표현들이다. 딱히 특정 단어로 한정하기가 어렵다. 과학자·교수·시민활동가 등으로 지난 30년간 그가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크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국통신학회장, IEEE통신학회 부회장,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대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등 직함도 가지각색이다. 이처럼 다양한 역할을 수행 중이면서도 이 교수는 전형적인 과학자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관악산 연구실에서도 그는 한 가지 주제만을 고집했다. “수학·과학 교육이 서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습니다.”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화두가 두 시간 내내 이어졌다. 화려한 화술이나 카리스마로 포장되지 않았기에 더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제언이다.
#공학교육이 서야 산업의 미래가 있다
“가능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필요한 일인지가 문제다”
이 교수가 새로운 일을 착수할 때 판단 근거로 삼는 기준이다. 과학자다운 고집이 묻어나는 원칙이자 이 교수식 행동방식의 출발점이다. 대표적인 성과가 한국공학교육인증원(ABEEK) 설립이다. 국제적인 기준에 맞춰 공학 교육 프로그램을 평가하고 인증하는 제도다.
“미국은 유럽보다 공과대학 연륜이 짧지만 성과는 훨씬 앞서갑니다. 대표적인 배경으로 공학교육인증 프로그램(ABET)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엔지니어를 잘 기를 수 있도록 공학 교육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것이 미국이 산업혁명 주체인 유럽을 제치고 기술강국으로 군림하는 기반으로 작용했습니다.”
99년 이 교수는 과학계 원로들과 함께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설립을 주도했다. 문제는 인증 프로그램의 성격이었다. 공과대학이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해야 하는 구조라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 교수가 빼어든 카드는 ‘동참’이었다. 공학한림원·공대학장협의회·산업체·공학전문학회 등 관련 공동체 전문가 45인을 모아 실무위원회를 구성했다. 외인부대에 가까운 인적 구조라 의사결정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결국 이 덕분에 인증원은 성공적으로 출발했다. 지금까지 국내 전체 공과대학 중 10% 이상이 인증받을 만큼 뿌리도 내렸다. 삼성전자가 인증학과 출신에 가산점까지 부여할 정도로 산업계의 지지도 얻어냈다.
#국제 학술활동의 대가
이 교수를 평가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국제학술 활동 성과다. 90년 초 아시아지역 정보통신학술대회인 JCCI를 창설한 것이 국제 무대 데뷔였다. 대전엑스포를 기념해서는 아시아태평양 통신콘퍼런스인 APCC도 열었다. 성과를 인정받아 97년에는 세계적인 통신단체인 IEEE통신학회(Communications Society) 회원 최고권위 등급인 ‘펠로(FELLOW)’에 선정됐다. 2000년에는 IEEE통신학회 의결이사로, 2005년에는 선출제 부회장에도 선임됐다. 명실상부한 세계를 대표하는 통신학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 교수는 오랜 국제 학술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통신학회도 한 단계 도약시켰다. 90년대 후반 한국통신학회의 영문저널인 ‘JCN’ 창간을 주도, 만 6년 만에 국제인용지수(SCI) 등재 학술지로 인증받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이 교수 특유의 고집을 바탕으로 논문 투고·리뷰·배포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기준을 까다롭게 적용한 것이 성공 배경이다. 이 교수는 지난해 말 설립 32년을 맞은 한국통신학회 신임 회장에 취임했다. 학회를 명실상부한 국제 수준의 단체로 도약시키기 위해 IEEE통신학회를 모델로 조직과 운영 방식도 개선키로 했다. 그간 기능이 모호했던 부회장의 업무를 강화해 부회장 중심의 책임운영제를 도입했다. 논문지 및 학술지의 편집과 출판을 전문화하고 수준을 향상시키는 등 국가 IT분야 발전을 위한 학술적 기여도를 높여 나갈 계획이다.
“정부·산업체·연구계와 더불어 학계가 IT코리아를 이끄는 한 축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에 맞게 학회의 활동과 위상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과학기술과 산업이 꽃피는 사회
이 교수는 2005년 12월 국내 과학계 리더와 함께 시민단체인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을 출범시켰다. 과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교수들이 손잡고 실험실을 뛰쳐나왔다. 이 교수는 이공계 기피, 인재 유출 등의 근본 원인을 과학적 토양이 부족한 우리 사회의 근본 구조에서 찾는다.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의 반대편으로 쏠리게끔 사회의 구도가 잘못됐다는 진단이다. 대안으로 수학 과학 교육 강화를 국가 어젠다로 제시했다. 정부 정책을 과학적 기조로 수립하기 위한 대안도 내놓았다.
이 교수는 수학 과학 교육 강화 논의가 자칫 과목 이기주의로 치부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기초 과학과 응용·생활 과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연구실을 벗어나 낯선 시민단체 활동까지 나선 이 교수는 과실연을 우리사회에 믿음직스러운 조언을 제시하는 어른 같은 단체로 자리 매김시키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우리 사회는 핵심 문제인데도 다급하지 않다고 미루는 사안이 너무 많습니다. 교육을 바로잡는 일도 수명이 짧은 관료나 정치인에게만 맡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10∼20년 후 사람들이 가치판단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단체로 과실연을 만들어나갈 계획입니다.”
김태훈기자@전자신문, taehun@
◆이병기 교수는
195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 서울대 전자공학과, 경북대 전자공학 석사를 거쳐 82년 미국 UCLA에서 공학박사를 마쳤다. 미국 통신회사인 Granger, 벨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86년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교수로 부임,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 중이다. 97년 IEEE통신학회 ‘펠로’에 선정됐으며 지난해에는 선출제 부위원장에 당선, 세계적 통신학자로 인정받았다. 97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에 선정됐으며 2001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상, 2005년에는 경암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2000년 서울대 연구처장, 뉴미디어통신연구소장을 비롯해 2003년 한국공학교육학회장, 한국공학교육인증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과실연 상임대표, 한국통신학회장, 국가과학기술 자문회의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