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메모리업계에서 1·2등을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는 자사가 생산하는 메모리 칩의 원산지를 계속해서 ‘메이드 인 코리아’로 표시하기 위해 ‘때아닌 갈등’을 빗고 있다.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가치는 크다. 완제품 만큼은 아니지만, 반도체도 ‘메이드 인 차이나’ 또는 ‘메이드 인 타이완’에 비해 고객들의 코리아브랜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배경은 이렇다. 지금까지는 반도체(모놀리식 칩) 칩에 대한 통일된 원산지 규정이 없어, 세계반도체업체들은 자사 편의에 따라 전공정(웨이퍼) 단계의 제품을 원산지로 표시하기도 하고 후공정(패키징)단계의 제품을 원산지로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무역기구(WTO)가 무역통계상의 어려움을 들어 반도체 원산지규정 통일화 작업을 벌이고 있어, 이 결과에 따라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극명하게 희비가 엇갈린다.
미국 일부 팹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전공정 팹을 국내에 두고 있는 삼성전자는 웨이퍼를 생산하는 전공정 단계에서 원산지가 결정돼야 보다 많은 물량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새길 수 있다. 만약 후공정 기준으로 확정되면 중국 쑤저우공장에서 패키징한 물량의 모두가 ‘메이드 인 차이나’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로 한국·중국·미국으로 팹이 분산돼 있는 하이닉스는 반도체 제조가 완료되는 패키징 단계에서 원산지가 결정돼야 더 많은 ‘메이드 인 코리아’를 자사 칩에 새길 수 있다. 만약 전공정 기준으로 확정되면 중국 우시 팹에서 만든 웨이퍼는 완제품이 국내에서 생산된다고 해도 ‘메이드 인 차이나’가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서로 유리한 안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고, 이 합의 결과를 가지고 국제회의에 나가야 하는 정부의 입장은 갑갑하기 그지 없다.
세계표준안 마련을 위한 국제회의가 이 달 대만에서 열린다. 이 회의에서 한국이 단일안을 제시하려면 채 한달도 남지않았다. 지금까지로보아 두회사가 모두 만족할 만한 솔로몬 해법은 없어 보인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이 입장을 유보해야만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그렇다고 정부가 지레 합의점 찾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삼성과 하이닉스도 이제부턴 양보없이 자기 주장만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양사의 이해관계도 중요하겠지만 세계 1, 2위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이를 지켜보는 업계에서는 “가위 바위 보로라도 결정해야 한다”며 핀잔섞인 농담까지 주고받는 판국이다.
심규호기자@전자신문, khs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