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이어 세계 양대 거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11억 인구의 인도시장에서 한국 전자산업의 위상은 어느 정도에 와 있을까.
한국 수출전사들의 인도시장 개척노력의 성과를 인도인들에게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인도행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올리버 도우자씨(35·모토로라 부장)는 “LG와 삼성은 마케팅을 잘한다. 다른 기업이 하지 못한 로컬라이제이션에 성공했다. 소니와 같은 일본기업은 대부분 인도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해줬다. 현지에서 방문한 대형 전자제품 대리점에서도 LG·삼성의 영향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뭄바이에서 방문한 대형 전자양판점 소니모니의 N P 싱 매니저는 “최근 일본 제품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도에서 개발해 제조하는 LG·삼성이 시장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지난해 브라운관TV와 냉장고·세탁기·에어컨·전자레인지 시장에서 26∼42%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고 GSM 휴대폰 시장에서도 하루 10만대 판매 기록을 세우며 선전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LCD TV 시장을 새로 창출해 1위를 차지하는 등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결한 위생상태와 물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풍토병·전염병 등을 극복하기 위해 무수한 역경을 거친 수출전사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
◇풍토병을 꺾은 수출전사=인도여행객들은 예외 없이 인도의 위생상태를 두려워 한다. 신상품을 팔기 위해 인도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수출전사들의 경우 어딜 가나 많은 모기 그리고 식사 때마다 사단병력의 파리떼와 맞닥뜨리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병에 넣어 파는 생수를 먹지 않으면 배탈이 나는 인도의 불결한 위생상황 또한 복병이다. 그래서 한국여행객들은 흔히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러시아를 칠 때 먹었다는 정로환(征露丸)을 인도여행에 가져가곤 한다. 신문범 LG전자 인도법인장은 그것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알려줬다. 인도에서 탈이 난 것을 한국에서 가져온 약으로 치료할 수 없었다. 균이 워낙 특이하고 독해서 현지에서 파는 약을 먹어야 제대로 듣는다는 게 조언이었다.
마케팅의 ABC 중 하나는 철저한 현지화. 그런 면에서 2월로 꼭 10년째를 맞는 LG전자의 현지 경영은 몸으로 부딪쳐 얻어낸 모범답안이었다. 지금은 동남아지역대표로 옮긴 전임 김광로 법인장은 인도시장 진입의 최대 관건인 전국 판매망 확보를 위해 각 지방도시를 직접 발로 뛰었다. 덕분에 모든 인도진출 기업이 부러워하는 현지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델리·뭄바이·콜카타·첸나이를 중심으로 한 인도 전역에 1만6500개의 세일즈 채널과 1200여 서비스 채널이 확보됐다. 이것이 ‘LG 인도 신화’의 밑바탕이 됐다.
인도시장 개척의 숨은 주인공인 강호섭 부장은 “아무리 더워도 도저히 맨살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호텔침대에서 옷을 다 껴입고 자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인도 전역을 샅샅이 훑으며 만들어낸 지역 판매망이 LG전자가 현지서 성공하도록 한 최고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신문범 법인장은 마케팅 전략을 담은 파워포인트 자료를 들고 1년 6개월 동안 인도 전역을 돌았다. 딜러들에게 직접 강연을 하고 식사를 같이 하며 공감대를 얻어냈다. 세련된 마케팅 전략과 현지 딜러가 전한 고객의 소리를 조합해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만들어 냈다. 위생이 안 좋은 지방 숙소에서 현지 처방약을 먹으면서도 혈변을 볼 정도로 고생하며 얻어낸 귀한 성과였다.
◇현지화만이 살길=현지화 전략은 인도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노이다 공장 운영 방침에도 반영됐다. 품질 수준을 정의해 준 뒤 인도인 부장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줬다. 앞선 품질관리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를 십분 활용했고 우수한 동료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잘 반영했다. 사원가족을 위한 스포츠클럽·음악클럽·지역사회봉사 등도 다양하게 마련해 살가운 경영을 했다. 인도인 직원들의 반응은 무척 좋았다.
이를 기반으로 19만㎥ 규모의 노이다 공장은 일정 품질을 유지하며 연간 200만대의 TV와 130만 대의 냉장고, 각각 60만대의 세탁기와 에어컨 등을 쏟아낸다. TV와 휴대폰을 만드는 뭄바이 인근 푸네 공장, 한국에서 들여오는 일부 고급 모델과 더불어 인도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제품들을 현지에서 현지인의 손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로컬 협력업체도 많이 발굴해 품질을 개선시켰다. 제품 고급화와 판매량은 인도 경제의 성장과 함께 꾸준히 상승해 가는 구조다.
제품도 철저히 현지화했다. 인도 영화의 화려한 음향을 살리면서 인도인 가정 거실공간에 맞게 디자인한 사운드 강조형 슬림 TV가 대표적이다. 화려한 색상을 좋아하는 인도인들에게 맞는 디자인을 찾기 위해 현지 대학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인도인들의 아파트·빌라 생활이 늘어나는 데 맞춘 제품 개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인도인들이 열광하는 크리켓 경기를 후원하며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다.
◇로컬기업들이 쫓아온다=하지만 화려한 성공기,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이 혁명처럼 급변하는 인도시장에서 일본기업들의 투자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소니와 파나소닉이 양판점 매대의 목좋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TV시장에서 꾸준히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시장 구분이 다르지만 산수이의 LCD TV, 비디오콘의 세탁기 등 로컬기업 제품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좀 괜찮은 건물의 창문에서는 비디오콘과 함께 인도의 양대 가전사로 급성장 중인 오니다 브랜드의 에어컨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인도시장의 파이가 커진다고는 하지만 최근 국내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줄어드는 징후도 나타나고 있다.
휴대폰이 매월 600만대 이상 팔려나가는 인도 시장에선 LG와 삼성이 노키아·모토로라·소니에릭슨의 저가 보급형 제품에 밀리는 형국이다.
30∼60달러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저가 시장 전략의 딜레마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단기간 손해를 보면서라도 시장점유율을 늘려 인도시장에 말뚝을 박아 놓아야 하는지, 철저한 고가전략으로 이익률을 유지하되 점유율 감소를 감수해야 하는지, 매일매일이 갈등과 판단의 연속이다. 인도시장이 전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인도의 IT코리아는 제2의 도전기를 맞고 있었다.
◆인터뷰-신문범 법인장
“10년전 기본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인도시장 개척의 바통을 이어받은 신문범 LG전자 인도법인장(53·서남아지역 대표·부사장)은 제2의 도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기본으로의 회귀(Back to basic)’를 화두로 삼았다. 브랜드 인지도와 시장점유율이 제로였던 10년 전, 잃을 것이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 새로운 도전정신을 갖자는 것이다.
신 법인장이 내부에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는 품질이다. “지금도 6시그마를 시행하고 있지만 제조·물류·기획 등 모든 부문에 품질경영을 강화할 겁니다. 업무성과, 브랜드이미지, 매출과 이익 모두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 경쟁지수를 분석, 심화할 생각입니다. 그런 뒤에 신명나게 오너십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자율경영을 도입해야죠.” 이른바 ‘Q컬처 전략이다. 보다 앞선 경영기법을 배우고 싶은 의지가 강한 인도인들의 심리를 잘 반영한 전략이다.
두 번째는 고객. 신 법인장은 “전임 김광로 법인장이 다진 탄탄한 인프라에 철저한 마케팅 전략을 더하려 한다”며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상식과 경험을 녹인 전략을 마련하고 인도 전역의 파트너와 생각을 공유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도법인 발령 후 1년 반에 걸쳐 전국의 파트너를 찾아가 만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새롭게 성장하는 휴대폰 시장에 집중했다. “단말기 수리를 1시간 내에 마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1시간 내 수리가 어려울 경우 바로 임대폰을 내줘 소비자 불편을 없애줍니다. 소비자가 체험하는 서비스의 질을 극대화하는 거죠.”
덕분에 지난해 1분기 6만여대였던 GSM폰 시장에서 LG 제품의 판매량은 1월 들어 30만대로 올라섰고 이어 하루 최고판매 10만대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신 법인장은 인도시장에 확신을 보였다. 일본기업들이 발을 들였다가 철수한 시장에서 꾸준히 성과를 쌓은 것이 지금의 신화를 만든 기반이 됐다는 것. “10년 전 싸구려 시장, 아무 것도 없던 데서 공장을 세우고 어려움을 극복해냈습니다. 그때 뿌린 과실을 지금 먹는 거죠. 그 사이 관공서도 기업친화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인도는 크게 성장할 겁니다.”
“Q컬처를 통해 가전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프리미엄 톱 내셔널 브랜드’로 올라서는 것이 목표입니다. 단말기 분야에서도 1위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닦을 겁니다. 내수에서 가장 촉망받는 기업시민이 돼야 합니다. 동시에 수출 전진기지로서 매년 40% 이상 성장을 이뤄내고 경쟁력을 키워 중국기업의 진입을 봉쇄, 시장을 지켜내야죠. 올해 23억달러의 매출을 올려 그 첫발을 뗄 계획입니다.”
노이다(인도)= 김용석기자@전자신문, yskim@
이재구부장@전자신문,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