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오전 8시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출근시간을 1시간여 앞둔 때지만 구로역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2분 단위로 도착하는 지하철에선 수백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디지털단지에서 이들 출근 행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은 김밥·토스트 등을 파는 ‘거리 음식점’. 1번 출구 앞에만 10개 이상이 집중돼 있었다. 지난 2002년 이후 IT업체들이 집중되면서 생겨난 풍속도다. 구로역사 측은 “8시에 이렇게 많은 이용객이 몰리는 곳은 서울에서 학원가인 노량진과 구로뿐일 것”이라며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거리 음식점 메뉴도 업그레이드되고 있다”고 말했다.
구로디지털밸리(정식 명칭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됐다. 6000여개 공단 입주 업체의 평균 직원 수는 10여명. 대한민국 표준 벤처다. 디지털밸리에 근무하는 직장인. ‘호모 디밸리니쿠스’의 ‘출근 전쟁’에서 ‘퇴근 전쟁’까지 하루를 따라가 봤다.
◇출근 전쟁=1단지 한 중소 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홍성호 과장(34)을 만난 시각은 오전 8시 10분.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그는 성북동 집에서 7시에 나왔다고 했다. 갈아타는 시간을 포함, 50여분이면 충분하지만 오늘은 지하철을 빠져나오는 데만 10분 이상 걸렸다고 투덜댔다. 이용객이 배가량 늘어나는 매주 월요일이면 겪는 현상이다.
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근무하는 직원은 8만여명. 이들 중 2만명 정도가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다른 역에 비해 2배 이상 되는 과부하다. 지하철 출근족 중 대부분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다. 홍 과장도 구로에 입성(?)한 지 채 일 년이 채 안 됐다. 그는 지난 2006년 8월 강남 테헤란밸리에 있던 회사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디밸족(디지털밸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됐다. 홍 과장처럼 테밸족에서 디밸족으로 변신한 사람은 지난 2006년만 해도 5000여명이나 된다. 홍 과장은 “매주 신규 업체가 입주, 공실률이 거의 제로”라며 “십중팔구는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세들어 살다 공단 분양받아 온 업체”라고 말했다. 강남 오피스 빌딩 임대료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선 같은 크기의 사무실을 분양받아 소유할 수 있다.
◇식사 전쟁=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오전 11시 이후 다시 바빠졌다. 점심 약속과 외부 영업을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특히 월요일은 업무 미팅이 많은 날이라 다른 날에 비해 두 배 이상의 혼잡을 감수해야 한다. 여의도·종로·테헤란밸리 등 여타 시내 오피스타운도 마찬가지 상황이지만 구로의 ‘식사 전쟁’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300만평 좁은 공간에 수천개 업체들이 밀집해 있지만 빌딩 내 구내 식당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식당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 공단인 탓에 식당, 미용실 등 서비스 업종 입주도 제한돼 있다.
MDS테크놀로지에 근무하는 이은영 과장과 함께한 ‘식사 전쟁’은 엘리베이터 타기부터 시작됐다. 어렵사리 내려왔지만 11시 50분 현재 지하 1층 구내 식당은 만원이었다. 오늘 메뉴는 불고기 덮밥. 판매가는 3500원으로 외부 식당에 비해 25%가량 싼 편이다. 현재 디지털밸리단지에는 총 62개 구내 식당이 있다. 구내 식당 관계자는 “매년 100여개의 업체가 신규 입주하다보니 혼잡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며 “싼 값에 맛도 괜찮아 외부 손님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퇴근 전쟁=오후 7시. 힘들었던 하루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다. 디지털산업 3단지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은 퇴근을 준비하는 직장인들로 분주했다. 서울 동북부에서 시작해 서남부를 관통하는 서울메트로 7호선은 이 역을 기점으로 포화상태에 이른다. 일상을 마치고 경기도 광명시 등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과 강남, 여의도와 같은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려는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뒤엉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서울메트로지하철 공사에 따르면 오후 7∼9시 이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만 1만여명에 이른다.
같은 시각 공단로도 내일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편도 2차선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빼곡히 차 있다. 공단로는 디지털 1∼3단지를 관통하는 유일한 간선도로다. 이 때문에 이 도로는 새벽 이른 시간을 빼곤 차들이 항상 점령하고 있다. 서울시, 구로구청은 교통 혼잡을 해결하기 위해 공단로, 번영길 등 공단 내부 도로를 확장하고 있지만 늘어나는 차량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퇴근 시간이 절정에 이른 오후 8시 퇴근 행렬을 보기 위해 산업단지공단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디지털산업 1단지엔 때 아닌 장관이 펼쳐졌다. 30여개 인텔리전트 빌딩을 빠져나오는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전조등 불 빛은 전등 예술 ‘루체비스타’를 방불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빌딩에 입주해 있는 업체가 평균 300여개에 이르니 차량도 건물당 300여대가 넘는다.
3단지 입주업체 아토정보기술의 이성호 과장은 “차량 증가로 건물을 빠져나오는 데만 10분 이상이 걸린다”며 “특히 공단오거리는 10분만 늦게 나와도 1시간 추가 정체는 감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로 벤처인, 강남에 비해 낙관적
구로 지역에서 근무하는 벤처인이 강남 테헤란밸리 직장인에 비해 벤처 성공 가능성에 더 낙관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본지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과 공동으로 구로디지털밸리(서울디지털산업단지)와 강남 테헤란밸리의 벤처 직장인 각각 9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구로디지털밸리 근무자의 45.7%가 구로디지털밸리가 실리콘밸리처럼 벤처밸리로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32.4%가 긍정적인 대답을 한 강남 테헤란밸리 근무자에 비해 높게 나타나 구로 지역 벤처인들의 해당지역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근무지에 대한 인식변화에 대해서도 구로 벤처인이 더 긍정적이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외부 인식 변화에 대해서는 구로디지털밸리 근무자의 85.9%가 ‘과거에 비해 다소 또는 훨씬 좋아졌다’고 응답해, 강남 테헤란밸리 근무자(23.5%)에 비해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한편 만족도 측면에서는 테헤란밸리 직장인이 앞섰다. 구로디지털밸리 지역 근무자는 강남의 절반 수준인 27.2.%가 현재 지역에서 근무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강남 테헤란밸리 지역 근무자는 절반 이상인 52.9%가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것에 만족하다고 응답했다.
◆서비스 업종 늘어난다
‘부동산, 치과, 법률 사무소, 문구점’ 지난 2002년 이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가장 많이 생겨난 서비스 업종이다. 과거 기계 공업 위주 공단에선 서비스 업종 입주율이 낮았지만, 최근 IT기업이 늘면서 이를 지원하는 서비스 업종이 배 이상 늘고 있다. 구로공단 업종 변화와 함께 후방 산업도 변모 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중개업소의 경우 매달 새로운 인텔리전트 빌딩이 들어서면서 현재 10여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 인터넷을 통한 중개와 인근 지역 사업장까지 합치면 이 수치는 3배가량 늘어난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부동산 중개소의 사업 모델은 특이하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경우 국가 공단인 만큼 입주 절차가 까다로운 편. 필요 서류가 일반 임대 계약에 비해 배 이상 많은 등 중소 IT업체가 이 모든 서류를 준비하기가 사실상 버겁다. 이 때문에 이 지역 부동산 중개 업소는 입주 자격에서부터 필요 서류까지 제공하는 ‘원 스톱’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빌란트 부동산 측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입주 부동산 중개소의 경우 각 기업에 최적화된 사업장을 소개하는 것이 주된 일”이라며 “이와 함께 , 입주 업체를 대상으로 세율 할인 등 종합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치과도 2002년 이후 급증한 대표적 업종이다. 현재 인텔리전트 빌딩 3개 당 하나 꼴로 성업 중이며 대개 서비스 업종이 밀집해 있는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다. 공단 소재 치과는 점심 시간이 없는 반면 다른 지역에 비해 1시간 이상(오후 8시) 늦게 마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법률 사무소와 문구점은 과거에 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법률 사무소의 경우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제품 특허·디자인 분쟁, 수출 상담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주로 하고 있다. 또 문구점은 단순 자료 복사, 문구류 판매를 뛰어넘어 팸플릿, 제안서 제작 등 업무 지원 서비스가 주된 업무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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